한국 정치 불안해도 젊은이들 똑똑해 30 ~ 40년은 괜찮을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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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 수품 60주년을 맞은 정의채 몬시뇰. “나이가 들면 좋고 싫음이 다 없어진다. 수양 때문이 아니라 자연적으로 그렇게 되는 것 같다”고 했다. [김경빈 기자]

국내 천주교계 원로인 정의채(88) 몬시뇰. 가톨릭 고위 성직자에게 붙이는 존칭인 몬시뇰이 그처럼 어울리는 사제도 흔치 않다. 그가 신부가 된 건 한국전쟁 막바지인 1953년 8월. 그의 사제 수품 60주년을 축하하는 자리가 28일 오전 10시 서울 명동대성당에서 열린다.

 정 몬시뇰은 신학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현실에 대한 따끔한 발언으로 한국 가톨릭의 ‘맏형’ 역할을 해왔다.

지난해에는 문명비판서 『인류 공통문화 지각변동 속의 한국 1』도 냈다. 세계사의 중심이 서양에서 동양으로 넘어가고, 그 과정에서 한국의 역할이 크다는 내용이었다. 앞으로 2, 3권을 계속 낼 예정이다. 서울 압구정동 숙소에서 그를 만났다.

 -사제생활 60년, 흔한 경우가 아니다.

 “만감이 교차한다. 시간이 빠르다는 걸 실감한다. 거의 아흔이니 상당히 오래 살았다. 한바탕 꿈만 같다. 이만큼 살았지만 솔직히 말해 죽을 것 같지는 않다. 신앙인으로서 영원히 산다고 믿으니까 그런 것 같다. 나이 드니 좋은 점도 있다. 나쁜 기억은 사라지고 좋은 기억만 남는다.”

 -가장 보람 있던 일이라면.

 “평북 정주에서 태어나 한국전쟁 때 월남했다. 인민군이 내 머리와 가슴에 총을 겨눈 적도 있다. 우여곡절 끝에 부산에 내려가 초량동 성당에서 사목활동을 했다. 너무나 힘겨웠던 시절, 희망을 불어넣어야 했다. 강론 시간에 우리는 다시 일어설 수 있다, 반드시 통일 될 거다, 이런 얘기를 자주 했더니 매년 신자가 크게 늘었다. 사목 생활 4년째인 56년에 1700명에게 영세를 줬다. 신부 한 명이 한 해 100명 세례 주면 잘 주는 거라고 하던 때였다.”

 정 몬시뇰은 진보·보수 어느 한쪽에 갇히지 않으면서 사회 현안에 대해 적극적인 발언을 해왔다. 노무현 정부 때는 대통령의 ‘가벼운 언행’을 꼬집었고, 이명박 대통령 시절엔 4대강 사업을 비판했다. 그는 박근혜 대통령에 대해서도 “사람을 잘 써야 하는데 인사가 폐쇄적으로 됐다”고 지적했다.

 -지난해 발표한 책의 스케일이 컸다.

 “세계사를 1000년(밀레니엄) 단위로 끊어 보자고 했다. 첫 번째 1000년에는 예수가 태어나 노예제가 없어졌다. 두 번째 1000년에는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가 성했다. 앞으로 새 1000년에는 세계사의 중심이 서양에서 동양으로 넘어올 것이다. 경제 기적을 일군 한국이 할 일이 많은데 새 정부는 이런 거대한 변화에 둔감한 것 같다.”

 -담론이 너무 큰 것 아닌가.

 “아니다. 우리 젊은이들은 어디 내놔도 경쟁력 있다. 우리나라는 정치인들이 제 역할을 못해도 젊은이들 때문에 앞으로 30∼40년은 괜찮을 거다. 특히 한국은 서방 선진국들이나 일본과 달리 아프리카·아시아의 개도국들에 역사적으로 빚진 게 없다. 지난해 유엔 녹색기후기금(GCF) 유치에 성공한 것도 170여 개도국들의 지원을 받은 결과다. 이런 점을 잘 활용하면 한국은 더 발전할 수 있다.”

 -기성세대가 분발해야 하나.

 “박 대통령이 이런 변화를 감지하고 좀 더 큰 안목을 가졌으면 한다. 세계의 흐름을 통괄하는 사람이 대통령 주변에 별로 없는 것 같아 안타깝다.”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최근 새 교황 프란치스코를 맞아 뭔가 분위기 일신을 꾀하고 있는 로마 가톨릭 쪽으로 넘어갔다.

 -새 교황 덕분에 변화가 올 것으로 보나.

 “교황이 유럽 밖에서 나왔다는 것, 역사의 터닝포인트를 찍은 셈이다. 백인 중심, 로마 중심의 세계가 달라질 것이다. 가장 심하게 착취 당했던 남미에서 교황이 나왔다는 것 자체가 그렇다. 다음 교황도 유럽에서 나올 가능성이 크지 않게 됐다.”

 -기대가 매우 크신 것 같다.

 “새 교황의 인상이 굉장히 부드럽다. 자기 덕성에서 나온 얼굴이다. 가난과 겸손이다. 남미의 가난, 선진국 착취에 따른 가난을 뼈저리게 느꼈을 것이다. 다음 시대에 교회가 가야 할 길을 제시했다. 취임 미사 때 섬김을 하자고 했다. 바티칸의 힘은 보통이 아니다. 우리도 손을 잡아야 한다. 권력은 평민에게, 그리고 부는 빈자에게, 그 밑바탕에는 사랑이 있어야 한다.”

 -요즘 지내시는 건 어떤가.

 “지난해 척추수술을 받았다. 석 달 동안 병원에 있었다. 지팡이 짚고 앉았다 일어나는 게 불편하지만 식사는 잘하고 있다.”

글=신준봉 기자
사진=김경빈 기자

◆정의채 몬시뇰=1925년 평북 정주 태생. 로마 우르바노대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명동성당 주임신부, 서강대 석좌교수 등을 지냈다. 2005년 교황청이 임명하는 명예 고위 성직자인 몬시뇰(monsignor)이 됐다. 저서 『형이상학』 『모든 것이 은혜였습니다』, 역서 『신학대전』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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