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기관 111곳 경영평가 기관장 물갈이 압박 시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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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일 김건호 한국수자원공사 사장의 자진 사퇴로 공공기관장 물갈이가 본격화할 조짐이다. 김 사장에 이어 주요 공기업 사장들도 스스로 물러날 뜻을 내비치고 있다. 이지송 LH공사(한국토지주택공사) 사장은 최근 주변에 “언제든 그만둘 수 있다”는 말을 자주 하고 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측근으로 분류되는 또 다른 공기업 사장도 본지에 “어떤 경우라도 담담하게 받아들일 생각”이라고 했다.

 하지만 일각에선 “일단 버텨 보자”는 기류도 감지된다. 한 기관장은 “(청와대에서) 공식적으로 나가라고 하지 않는 한 그대로 있겠다”고 말했다. 이들에 대해선 공식적인 압박이 가해질 전망이다.

 기획재정부 공공기관 경영평가단은 27일 여수광양항만공사·국립공원관리공단에 대한 현장실사를 필두로 ‘2012년도 공공기관 경영실적 평가’에 착수했다.

 인천공항·한전 등 111개 기관의 6개월 이상 재직한 기관장 100명과 상임감사 58명이 대상이다. 평가는 5월 말~6월 초 공공기관의 이의신청과 보강자료 제출 확인 등의 절차를 거친 뒤 6월 20일까지 공공기관운영위원회의 의결을 거쳐 확정된다. 평가 결과는 공공기관장·감사에 대한 살생부 역할을 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S·A·B·C·D·E까지 6개 등급 가운데 최하위 E등급을 받으면 재정부는 해당 기관장 해임을 건의하게 된다. D등급을 2년 연속 받아도 마찬가지다.

 물밑 압박도 병행할 것으로 보인다. 최근 대기업 출신 공기업 사장은 청와대로부터 사퇴 요청 전화를 받았다고 한다. 사내에선 사장 교체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청와대 관계자는 “이미 상당수의 공공기관장이 사의를 표명한 것으로 안다”며 “일부 인사에 대해서는 이미 인사위원회에서 적임자를 물색해 민정라인에서 검증작업에 돌입한 상태”라고 전했다.

 5년 전 이명박 정부에선 물갈이가 상당히 거칠게 이뤄졌다. 집권 세력이 진보에서 보수로 바뀌는 과정이었기 때문이다.

 2008년 3월 11일 당시 한나라당 안상수 원내대표는 당 회의에서 “국정의 발목을 잡고 개혁을 방해하는 김대중·노무현 추종세력들은 그 자리에서 사퇴하는 게 옳다”며 물갈이의 신호탄을 쏘아올렸다. 다음 날 유인촌 문화관광체육부 장관과 이윤호 지식경제부 장관은 공개적으로 “이전 정권의 정치색을 가진 사람들은 임기가 남았어도 물러나는 게 자연스럽다”고 말했다. 청와대는 3월 14일 문화부의 대통령 업무보고 때 노무현 정부에서 임명한 정순균 한국방송공사 사장과 오지철 한국관광공사 사장을 오지 못하게 했다. 이들은 며칠 뒤 사표를 냈다.

 이 무렵 기획재정부는 101개 대형 공기업에 대한 경영실적 평가에 착수했고, 감사원은 한국전력·인천국제공항공사 등 공기업에 대한 고강도 감사에 나섰다.

 검찰도 움직였다. 대검 중수부는 2008년 5월 대대적인 공기업 비리 수사에 착수해 강경호 코레일 사장 등 82명을 구속기소했다. 심지어 민간인 사찰 파문을 일으킨 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실도 물갈이 작업에 활용됐던 정황이 드러났다. 청와대는 공공기관장으로부터 일괄사표를 받기도 했다. 결국 303개 공공기관장의 32%가 교체됐다.

 박근혜 정부는 이명박 정부와는 달리 가급적 부작용이 적은 방식으로 물갈이를 추진하겠다는 입장이다.

 청와대 핵심 인사는 “과거처럼 억지로 밀어내기보단 객관적인 경영지표를 근거로 한 ‘시스템 물갈이’를 추진할 것”이라며 “MB 정부의 물갈이가 논란이 됐던 것은 물갈이로 생긴 빈 자리를 낙하산이 메웠기 때문인데, 박근혜 정부는 선거 결과에 대한 논공행상식 기관장 임명은 고려하고 있지 않다”고 강조했다.

최준호·김정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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