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죄 형량 대폭 상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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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클레인 기사 이모(52)씨는 2011년 12월 시비 끝에 공사 책임자 A씨를 살해했다. 이씨는 A씨가 포클레인에 돌을 던지자 포클레인 삽으로 다리를 쳐서 넘어뜨리고 등을 내리찍은 뒤 도주했다. 사건을 맡은 서울고법 형사2부는 “범행이 잔혹하고, 아무 구호 조치 없이 현장을 벗어났다”며 이씨에게 징역 10년을 선고했다.

 지난해 12월 수원지법 형사11부는 내연녀의 10대 딸을 두 차례 성폭행한 혐의로 기소된 이모(54)씨에게 징역 15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미성년자인 피해자를 흉기로 위협해 성폭행하고 내연녀의 나체를 카메라로 촬영하는 등 죄질이 나빠 장기간 사회에서 격리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두 재판부 모두 개정된 법률과 양형기준을 충실히 따라 판결한 것이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가장 중한 범죄로 여겼던 살인죄보다 성범죄의 형량이 더 높게 나왔다. 최근 성범죄가 빈발하자 국회가 성범죄에 대한 법정형 자체를 대폭 높인 데다 대법원도 양형기준을 크게 강화한 데 따른 현상이다. 실제로 양형기준상 13세 미만 또는 장애인을 대상으로 한 강간상해죄의 기본형 범위는 징역 9~14년이다.일반적인 동기에 따른 살인의 기본형(9~13년)보다 높다.

 이처럼 ‘형량 역전’ 현상이 발생하자 ‘살인죄 양형기준을 높여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졌다. 일선 판사들도 “성범죄가 살인죄 못지않은 중대 범죄지만 살인죄의 양형기준이 상대적으로 낮다”는 의견을 밝혔다.

 이에 따라 대법원 양형위원회(위원장 이기수)는 25일 제47차 회의를 열어 살인범죄 양형기준을 높이는 내용의 초안을 확정했다. 초안에 따르면 원한·가정불화·채무관계 등으로 인한 ‘보통동기살인’은 기본형이 9~13년에서 10~16년으로 늘었다. 보복살인·묻지마살인 등 ‘비난동기살인’은 12~16년에서 15~20년으로, 성폭행·약취·강도 등이 수반되는 ‘중대범죄 결합살인’은 17~22년에서 20년 이상 또는 무기징역으로 올렸다. 여러 명을 살해하는 ‘극단적 인명경시살인’도 22~27년에서 23년 이상 또는 무기징역으로 양형기준을 높였다. 양형위는 가중 또는 감경사유가 있는 경우에 대한 양형기준도 조금씩 높였다.

 양형위는 또 아동·청소년·장애인을 속이거나 억압해 성범죄를 저지른 사건에서 폭행이나 협박이 없다면 형을 줄여줄 수 있도록 한 ‘특별감경인자’ 조항을 삭제했다. 쉽게 겁을 먹거나 저항하지 못하는 피해자를 대상으로 한 범죄는 구체적인 폭행이나 협박이 없었더라도 죄질이 가볍지 않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그동안 법정형량에 비해 너무 낮다는 지적을 받아온 성인 대상(13세 이상) 성범죄 양형기준도 상향 조정했다.

  양형위는 관계기관 조회를 거쳐 다음달 22일 열리는 제48차 회의에서 살인범죄 및 성범죄의 수정 양형기준을 최종 의결할 예정이다.

이동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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