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현금만 3000억 가진 회장, 콤플렉스 때문에…

중앙선데이

입력

업데이트

서울 종로의 탑클라우드 빌딩에는 삼성증권에서 거액자산가만 관리하는 프라이빗뱅커(PB) 점포가 있었다. 30억원 이상의 현금 자산이 있는 개인투자자를 특별관리하던 점포다. 당시 이곳에 현금으로만 약 3000억원을 맡겨 두고 있던 최대 고객이 윤석금(68) 웅진그룹 회장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이 돈으로 건설사를 인수할 것”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은행에 맡겨 두고 평생 이자만 받으며 살아도 다 쓰지 못할 엄청난 현금인데 왜 위험한 사업을 더 벌여 날렸을까 하는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윤 회장이 건설업 진출에 의욕을 보이자 주변에서 “더 이상 옛날의 건설이 아니다. 이제는 먹을 것 없는 껍데기일 뿐이다”며 극구 말렸다고 한다. 실제로 대우건설·쌍용건설 인수 등을 추진하다 안팎의 강한 반대로 꿈을 접는 듯했다. 그러나 집착을 버리지 않고 2007년 끝내 극동건설을 6600억원에 인수했다. 시장 평가액(3300억원)보다 2배나 비싸게 인수했다.

결과적으로 윤 회장은 극동건설 인수라는 단 한 번의 결단으로 33년간 쌓아 놓은 자신의 바벨탑이 무너지면서 인생의 원점으로 돌아가는 수모를 겪게 됐다. 지난해 그는 웅진그룹의 법정관리를 신청함으로써 재계 32위에서 추락해 사업 출발점인 웅진씽크빅(옛 웅진출판·직원 7명으로 시작한 책 판매업체) 하나만을 가지게 된 것이다. 한순간의 결단에 대한 대가치고는 가혹할 정도다.

외로운 결단의 순간.

하지만 리더들이 어느 날 갑자기 ‘자기확신’만으로 단칼에 내리치듯 결단하는 것은 아니다.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던 오랜 편견, 살면서 쌓인 경험들, 주변의 조언, 당장 손에 쥐고 있는 자금 사정 등이 머릿속에서 종합적으로 작용한 뒤 최종 결단을 하게 된다. 이런 측면에서 윤 회장이 극동건설을 인수하기로 결단하게 된 입체적인 배경을 살펴봐야 한다.

익명을 요구한 웅진그룹 계열사의 A 전 대표이사는 “윤 회장은 출판업으로 성공을 거둔 뒤 자신감이 생기자 2000년 초부터 미래의 먹을거리 사업으로 건설업과 보험업 진출을 하겠다고 말하곤 했다”며 “보험업은 국내 최고의 방문판매 인력과 연계한 시너지 효과가 커 누구나 생각할 수 있었지만 건설업에 집착하는 모습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그는 “윤 회장이 창업 1세대라는 점을 깊이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귀띔했다. 창업 1세대 경영인들은 사업이 어느 정도 정상궤도에 오르면 생뚱맞게도 건설업에 눈길을 돌리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이들의 건설업에 대한 집착 이유는 다양하다.

1950년대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건설업 진출 에피소드가 대표적이다. 그는 원래 미군 자동차를 수리하던 현대자동차서비스로 출발했다. 그런데 인근에서 관급공사를 많이 하던 사장이 월말만 되면 부대에 돈을 담아 가는 것을 보고 항상 부러워했다고 한다. 정 명예회장이 돈을 벌려면 건설업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계기가 됐다고 한다. 공식적으로 윤 회장은 건설업 진출을 결단하게 된 이유를 미래의 먹을거리를 찾다 보니 진출하게 된 것뿐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건설업계에서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듣지 않는다.

윤 회장을 잘 아는 국내 유명 건설업체 B 회장의 애정 담긴 분석이다. 그는 사석에서 “윤 회장이 극동건설을 인수한다는 얘기를 듣고 너무 안타까워 데려다가 패 주고 싶었다”며 “그는 국보급 같은 ‘세일즈의 천재’다. 이를 토대로 세계적인 기업으로 키웠어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이어 “중견기업이 되면 갑자기 ‘재벌 놀음’을 해 보고 싶어지는 충동이 생기는데 윤 회장은 그것을 자제하지 못했다”는 지적도 했다.
웅진그룹 계열사에서 사장을 지낸 C 전 대표이사의 설명도 눈길이 간다.

“조심스럽지만 윤 회장은 ‘사업 콤플렉스’와 ‘학력 콤플렉스’, ‘시골 콤플렉스’가 있었다. 책 세일즈맨은 사회적으로 인식이 좋지 않았다. 그렇다 보니 그는 책장사로 돈을 번 사람이라는 ‘사업 콤플렉스’가 컸다. 또 강경상고 출신으로서 은행원이 꿈이었던 시골 출신이다. 그는 일이 잘 안 될 때 ‘고향 사람들에게 큰소리쳤는데 창피하다’는 말을 자주 했다. 흘려 버릴 수 있는 말이지만 그 속에는 많은 콤플렉스가 담겨 있다. 책장사가 아닌 누가 봐도 번듯하게 보이는 사업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웅진그룹 붕괴의 단초가 된 건설업과 ‘구름 위의 사업’이라는 태양광에 진출한 것은 그런 측면에서 봐야 한다.”

많은 사업가가 ‘건설업에 대한 로망’이 있다. 건설업체를 인수하면 매출 규모가 커져 중견기업에서 대기업으로 도약할 수 있기 때문이다. 건설업은 비자금을 마련하기가 용이한 업종이라는 그릇된 인식도 있어 급성장한 중견기업들이 무리하게 뛰어드는 경우도 많다. 또 ‘내 공장을 내가 지으면 된다’는 생각을 해 손대기 쉬운 업종으로 착각한다. 하지만 건설업은 앞으로 남고 뒤로 밑진다는 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게 업계의 설명이다.

윤 회장은 ‘돈에 대한 촉’이 있는 경영자로 평가받아 왔다. 원래 방문판매 출판업체에 불과하던 웅진이 90년대 번듯한 기업으로 도약할 수 있었던 것은 학습지업체인 웅진IQ 덕이었다. 당시에는 일일학습지가 주류였다. 그런데 윤 회장은 1만5000원씩 받던 일일학습지 대신 월간학습지를 만들어 18만원의 연간 구독료를 먼저 받는 방식의 아이디어를 냈다. 약 50만 명의 회원을 확보해 엄청난 현금이 쌓였다.

98년 외환위기 때는 웅진코웨이가 갑자기 수렁에 빠졌다. 한 대에 150만원이나 하던 정수기 매출이 3분의 1로 떨어졌다. 윤 회장은 한 달에 3만원씩 받고 렌털하자는 아이디어를 냈다. 렉스필드 골프장 회원권을 팔 때도 그의 촉이 발휘됐다. 당초 회원권을 한 개에 2억5000만원으로 책정했었다. 그런데 주변 시세가 5억원이라는 얘기를 듣고 윤 회장은 슬그머니 렉스필드 골프장 회원권을 5억원에 내놨다. 대성공이었다. 그런 그가 왜 건설업에 대한 촉은 무뎠을까 고개가 갸우뚱해지는 대목이다.

어찌됐건 윤 회장은 건설업 진출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2004년 웅진건설을 먼저 설립했다. 그러나 창업공신 등 내부의 반대 목소리가 만만치 않았다. 출판·식음료·서비스가 주업종인 기업이 전혀 다른 건설업에 진출하는 것에 대한 부담감 때문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윤 회장은 ‘두산그룹의 사례’를 들면서 내부의 반발 목소리를 잠재우곤 했다.

두산그룹은 맥주·코카콜라·햄버거·김치 등 식음료기업이었다. 그런데 맥킨지컨설팅의 조언을 받아 건설·기계·발전 등 중공업그룹으로 변신하는 데 성공했다. 윤 회장의 롤모델이 바로 두산그룹이었다. 실제로 그는 ‘두산의 행보’를 밟듯이 그대로 따라 했다. 우선 두산이 맥킨지 출신 컨설턴트들을 영입하듯이 보스턴컨설팅그룹(BCG) 출신 인재를 잇따라 영입하기 시작했다.

매출 2조원을 달성한 창립 25주년인 2005년 윤 회장은 그룹의 인적 쇄신을 단행한다며 유학파 젊은 컨설턴트들을 대거 영입했다.

30대 컨설턴트 출신들을 그룹 내 기획·전략담당 부서에 배치했다. 보스턴컨설팅그룹 출신인 윤석환(35·이하 당시 나이) 이사와 신광수(37) 상무보, 서영택(39) 상무를 그룹의 기획·전략담당으로서 신사업 추진업무를 맡겼다. 또 ADL·안진회계법인의 컨설팅·회계사 출신인 김동현(35) 상무보, 윤석범(36) 상무를 잇따라 영입했다.

이들은 윤 회장의 평소 관심사였던 건설업 인수 관련 보고서를 그의 입맛에 맞게 만들어 브리핑했다고 한다.

앞서 언급한 A 전 대표는 “윤 회장이 건설업에 집착하면서 창업공신 등 이에 반대하던 측근들이 자연스럽게 하나 둘씩 떠났고, 반면 자신의 뜻에 맞장구칠 수 있는 외부 사람들이 잇따라 들어오게 됐다”며 “경영기획실에서도 그의 입맛에 맞는 내용만 짜맞추듯 장밋빛 보고서를 지속적으로 올려 인수 결단을 내리도록 유도했다”고 말했다. 결국 주변 상황은 매우 어려웠는데도 자기합리화를 하면서 무리하게 건설업에 진출했다는 지적이다.

웅진그룹 임원 출신인 D씨의 말이다.
“윤 회장은 ‘자네 부하는 몇 명인가’라는 질문을 가끔 했다. 리더인 당신을 믿고 따르는 사람이 몇 명이냐는 뜻이다. 그만큼 사람을 중시했다. 임직원과 목욕탕에 같이 갈 정도였다. 그런데 웅진이 매출 2조~3조원 회사로 급성장하자 그가 변하기 시작했다. 2005년에는 느닷없이 잘나가던 웅진식품을 팔겠다고 했다. 그의 논리는 미래 사업에 투자하고 사업이 잘되는 것은 팔아야 한다는 거였다. 하지만 지나고 보니 사장을 내쫓기 위한 논리였다. 어느 때부터인가 사람 내보내는 것을 쉽게 생각했다. 어떤 계열사는 11년 동안 10명의 대표이사를 교체하기도 했다. 많은 사람이 서운해하면서 떠났다. 그런 빈자리가 철모르는 30대 유학파로 채워지는 것을 보고 허탈했다.”

그렇다면 윤 회장이 주변의 만류를 무릅쓰고 건설업에 뛰어들 수 있었던 배짱은 어디서 나온 걸까. 윤 회장을 옆에서 지켜본 오랜 지인의 설명이다. “윤 회장이 자주 하는 말이 있었다. ‘나는 맨손으로 시작한 사람이다. 밑져야 본전이다’. 확신만 서면 투자는 얼마가 됐건 겁 없이 할 수 있는 스타일이다. 반면 다른 데는 사소한 것까지 아낀다. 그렇게 돈이 많았어도 본사 건물조차 없었다. 사업하는 사람이 왜 건물 같은 곳에 돈을 묻어 두느냐고 반문했다. 극동건설 빌딩은 인수할 때 따라온 것일 뿐이다.”

그의 사무실에는 불교 용어인 ‘淸淨心(청정심)’이라는 액자가 있었다. 맑고 깨끗한 마음가짐이라는 뜻이지만 불교 철학으로는 ‘진흙 속에서 연꽃을 피운다’는 의미가 있어 그가 좋아하는 글귀라고 한다. 윤 회장은 ‘매출 10조원의 꿈’을 꾸며 건설업에 진출했다가 쓰러졌지만 진흙 속에서 사업을 다시 일으키겠다는 의지는 버리지 않고 있다.

김시래 기자 srkim@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