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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값 주고 바보 된 ‘호갱님’ 구출 작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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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빙하기’. 한 이동통신사 관계자는 잔뜩 움츠러든 휴대전화 시장 분위기를 이렇게 표현했다. 실제로 요즘 온·오프라인 시장을 막론하고 방송통신위원회가 정한 상한선(27만원)을 웃도는 보조금이 사라졌다. 방통위가 이달 14일 불법 보조금 지급경쟁을 펼친 이통업계에 강력히 경고를 날린 뒤부터다.

 ◆보조금은 죽지 않는다

하지만 21일 본지가 입수한 휴대전화 리베이트 현황 자료에 따르면, 방통위 경고가 있은 다음 날인 15일에도 LG전자의 ‘옵티머스G프로’에 대해서 35만원의 리베이트가 제공된 것으로 확인됐다. 8일 55만원에 비해서는 금액이 낮아졌지만 여전히 보조금 상한선을 웃돈다. 리베이트는 휴대전화 단말기 제조사나 통신사가 대리점이나 판매점에 주는 판매 장려금의 일종이고, 보조금은 소비자가 받을 수 있는 단말기 할인액이다. 35만원의 리베이트 금액이 모두 보조금으로 바뀌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고객유치를 위해 언제라도 27만원을 웃도는 보조금을 줄 ‘총알’을 준비하고 있는 셈이다.

 삼성전자의 갤럭시노트2, 애플의 아이폰5에 대해서도 35만원의 리베이트가 제공되기는 했다. 그러나 이들 스마트폰은 출시된 지 4~7개월이 지났다. 옵티머스G프로는 지난달 21일 출고가 96만7000원에 시판됐다. 백화점 쇼윈도에 신제품 옷을 걸자마자 절반을 밑도는 가격에 아웃렛 매장으로 넘어간 격이다.

 업계에선 이전 모델인 옵티머스G가 예상보다 부진하자 신제품인 옵티머스G프로의 판매 비중을 끌어올리기 위해 동원한 고육책이라고 해석한다. 방통위 경고에도 ‘신상’을 30% 넘게 세일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한 통신사 관계자는 “보조금은 바퀴벌레와 비슷하다”며 “어떻게 해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보조금이 왜 나쁘냐?”

방통위의 경고로 보조금 시장에 ‘빙하기’가 찾아오자 소비자들 사이에서는 “비싼 스마트폰 싸게 살 수 있는데 뭐가 나쁘냐”며 보조금 규제 자체를 비난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전응휘 녹색소비자연대 정책위원은 “시장경제에서 사업자 간의 경쟁은 자연스러운 일인데 이를 ‘과열경쟁’이니 ‘과당경쟁’으로 치부하는 것 자체가 이상한 것”이라며 업계의 보조금 마케팅을 지지했다.

 그러나 방통위의 규제 없이 보조금 경쟁을 내버려둔다면 장기적으로 통신요금이 올라갈 수밖에 없다. 이통사의 사업모델은 간단하다. 원가는 투자비와 마케팅비, 매출은 통신료다. 1인당 매출에 가입자 수를 곱하면 매출이 나온다. 원가인 보조금을 늘리기 위해선 당연히 매출을 늘려야 한다. 가입자 수를 늘리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그렇다면 통신료를 올릴 수밖에 없다.

 또 돈을 보조금에만 쓰다 보면 네트워크 투자에는 쓸 돈이 없다. 통화품질이 저하될 수 있다. 유럽과 미국에서 최근 보조금 폐지 움직임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소비자가 체감할 수 있는 가장 큰 문제는 ‘호갱님(호구+고객)’의 양산이다. 보조금이 모두에게 똑같이 돌아가는 게 아니라 ‘폰테크족’이라는 일부 시장 사정에 밝은 이들에게 집중된다. 한 통신사 관계자는 “호갱님들은 27만원 보조금은커녕 판매점에서 ‘한 대만 팔면 퇴근한다’는 ‘퇴근폰’을 사기 십상이다”고 말했다.

 ◆ 호갱님 양산 막으려면

‘배고픈 건 참아도 배 아픈 건 못 참는’ 게 한국사람들 마음이다. 100만원에 육박할 정도로 스마트폰 값이 비싼 것도 문제지만, 더한 문제는 72만원에 산 물건을 다른 사람은 17만원에 샀을 때다. 곧, 더 이상 호갱님을 만들지 않도록 하는 게 휴대전화 보조금 정책의 핵심이 돼야 한다.

 이를 위해선 보조금보다는 오히려 리베이트 제한 규정을 강화하고 단속을 철저하게 해야 한다. 대리점들은 판매 장려금 조로 받은 리베이트 중 일부를 떼어 보조금으로 돌려, 휴대전화 값을 낮추는 방식으로 고객을 유치한다.

 보조금 경쟁이 한창 과열되면 제조사나 이통사는 판매경쟁에서 밀리지 않기 위해 리베이트를 대리점에 쏟아붓는다. 한 이통사 관계자는 “지난해 9월엔 리베이트가 100만원까지 갔었다”고 말했다. 출고가 99만원대인 갤럭시S3를 17만원에 팔아도 대리점에는 돈이 떨어진다. 소비자에게 돌아가야 할 돈이 대리점들 배만 불려주는 셈이다.

  한 업계 관계자는 “대리점에서는 리베이트가 많은 제품을 추천할 수밖에 없다”며 “제조사·통신사도 모두 문제라고 생각하지만 워낙 고착화된 유통구조라 바꾸기 어렵다”고 말했다.

 앞서 2011년 7월 KT는 모든 대리점에서 같은 제품은 같은 가격에 팔도록 하는 ‘페어프라이스(공정가격 표시제도)’를 도입했다. 당시 이석채 회장은 “누가 사느냐에 따라 단말기 가격이 천차만별”이라며 “같은 가격으로 단말기를 팔아야 소비자가 체감하는 가격이 내려갈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KT의 시도는 사실상 실패로 돌아갔다. 페어프라이스를 시행한 그 달에만 경쟁사에 2만 명의 가입자를 뺏겼다. 경쟁사 대리점은 충분히 확보한 실탄(리베이트)을 보조금에 쏟아부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리베이트 제한을 강화하면 인터넷으로 가전제품을 몇만원 싸게 살 수 있는 식이지, 최소한 지금과 같은 호갱님 양산은 막을 수 있다.

 궁극적으로는 휴대전화 제조사가 유통을 맡아야 한다. 이통사들은 보조금 경쟁이 아니라 네트워크의 질, 요금인하 경쟁을 해야 한다. 21일 SK텔레콤이 요금인하 정책을 발표한 것도 보조금 경쟁이 얼어붙자, 요금인하라는 혜택으로 소비자 잡기에 나선 것이다. 이통사의 최대 마케팅 수단이 보조금인 상황에서 요금인하는 요원한 얘기다.

 또 제조사가 유통을 맡게 되면 그간 비싸게 유지됐던 출고가를 낮출 수 있다. 소비자들이 100만원에 육박하는 물건을 쉽게 사기는 어렵기 때문에 휴대전화 가격을 낮춰 판매를 늘릴 것이다. 이상철 LG유플러스 부회장은 “가전제품을 사듯 휴대전화도 소비자가 대형마트 등에서 직접 사서 원하는 통신사와 요금제를 결정하는 방식으로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방통위 관계자도 “보조금 문제 해결을 위해 유통구조를 개선하는 것을 우선적으로 고려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달 초 열린 미디어미래연구소 포럼에서 김경환 상지대 교수는 “한적한 동네 아파트단지 골목에 6~7개의 휴대폰 대리점이 생기는 것은 과잉이익이 발생하고 있다는 증거”라면서 “통신비를 내리려면 단말기 판매와 이동통신 서비스를 분리하고, ‘단말기 임대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말했다.

고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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