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정우의 글로벌 아이] 방북 특사는 세계 대변인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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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북한의 대북특사 수용은 국제사회의 압박에 따른 결과다.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 선언은 미국에 국제원자력기구(IAEA)를 앞세워 북핵 문제를 유엔 안보리에 상정할 명분을 주었다.

물론 안보리 상정이 바로 대북 제재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경제난으로 시달리는 북한엔 어떤 형태의 제재라도 악몽일 것이 분명하다. 사태가 이쯤 되니 비로소 북한이 한국을 찾게 된 것이다.

사실 북한 하는 짓이 아둔하고 가증스럽다. 하지만 체제존망을 건 북한의 줄타기가 그들 나름대론 일리가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상대를 바로보면서 대처해야 한다.

실제 경제이익은 한국에서 챙기면서 아쉬운 소리 안하겠다는 심사나 받는 이가 오히려 큰소리치는 북한의 주제넘은 행태는 반세기 넘게 고립돼 살아온 구습에서 비롯된다.

결국 스스로의 선택에 따라 고립을 자초했던 북한이 바깥세상의 논리를 익히고 국제사회의 규범을 따르면서 문제아 같은 짓을 못하도록 달래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다.

평양을 향하는 방북특사가 가다듬어 볼 문제가 한둘이 아니다. 우선 국제사회의 의혹을 증폭시킬 어떤 언행도 금물이다. 더욱이 신정부 출범을 앞두고 당선자측 인사까지 동반하는 만큼 섣부른 약속에는 각별히 신중해야 한다.

삐끗하면 신정부 출발부터 북한의 볼모를 자초하게 된다. 게다가 특사단에는 주변국의 의사와 입장을 두루 타진한 외교안보수석도 포함돼 있다.

국제사회와의 조율결과에 대해 북측의 오판이 없도록 분명한 입장을 전달해야 한다. 혹시 '전달사고'라도 발생할 경우 국제사회로부터 불신을 사게 될 대상은 북한 아닌 한국이다.

둘째, 국제사회의 압박을 모면하는 데 남북한이 담합한다는 인상을 주어서도 안된다. 이번 특사는 단순히 한국 정부의 뜻을 전하는 임무 이외에 국제사회의 대변인 역할도 겸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된다. 이런 책무에 충실하지 못하면 향후 북한다루기에 있어 우리 입장에 대한 국제사회의 신뢰와 지지를 기대할 수 없다.

셋째, 북한의 핵무기 개발 의사와 관련해 근거없이 북측을 몰아세우는 것도 미련한 일이지만 북이 핵개발 의지가 없다고 단정하는 것은 더욱 위험하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북한의 처지에선 핵개발이 가장 합리적 선택일 수도 있다는 사실에 무심해선 안된다. 국제규범 밖에서 핵무기를 만들고 핵기술을 수출하며 게다가 미국으로부터 핵보유 국가로 인정받은 파키스탄이 북한엔 모범이 될 수도 있다.

결국 일회성 특사방북을 떠나 '핵을 가진 북'과 공존전략을 모색하든가 아니면 국제사회의 압력을 이용해 북의 핵무장 해제나 핵개발 의도 차단을 택할 것인가 전략적 선택에 직면해 있다는 절실한 자세로 북한을 상대해야 한다.

남북 정상회담을 하면서도 북한은 농축우라늄 핵개발을 진척시키고 있었다는 것이 부인못할 사실이다. 또 남북대화 그 자체가 북한의 군사위협 억지나 차단의 안전장치가 될 수 없다는 현실도 간과해선 안된다.

특사는 정상회담의 흥분이 남긴 결과가 과연 무엇인지 찬찬히 되돌아보길 바란다. 또 정상회담 이후 우리가 국제사회의 입김에서 보다 자유로워졌는지 아니면 상황을 악용한 북한의 억지 때문에 소모적인 외교전을 벌이게 된 것은 아닌지도 따져봐야 한다.

결국 국제사회가 외면하는 어설픈 민족공조를 부둥켜안고 가슴에 호소하다가는 공멸의 길을 갈 수밖에 없다는 절박감을 북한이 공유토록 깨우치는 것이 특사의 핵심 임무다.

길정우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