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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서울 거리를 어슬렁거리는 진짜 이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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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다니엘 튜더
이코노미스트 서울특파원

얼마 전 한 친구가 술잔을 기울이며 물었다. “한국에 계절이 몇 개인지 알고 있니?” “아마 4계절이라 할 줄 알았지? 요즘은 두 계절밖에 없는 것 같아.” 그러곤 머리를 흔들며 필자는 대답을 덧붙였다. “아냐, 여전히 4계절일세! 겨울, XX겨울, 여름, 그리고 XX여름.”

 필자는 굳이 여기서 다툴 생각은 없다. 하지만 한국은 여전히 근사한 계절을 누리는 느낌이다. 정말 좋은 나라다. 솔직히 필자의 기분은 햇살에 많이 좌우되는 편이다. 이런 의미에서 필자는 영 잘못된 나라에 태어났다. 영국 맨체스터에서 자랄 땐 비가 자주 왔다. 언덕 위 학교까지 눅눅한 습기에 젖거나, 거센 바람을 마주하거나 온통 짙은 잿빛을 뚫고 다닌 기억뿐이다.

 이제 3개월간 필자의 기분을 흡족하게 만들 봄이 왔다. 몇 년간 필자는 도심이나 시골을 무작정 걸어다니는 걸 즐겼다. 방향도 정해놓지 않고 몇 시간씩이나. 어릴 때 어머니는 “도대체 어디를 싸돌아다니는 거니”라고 묻곤 하셨다. 좀 더 직접적으로 “왜 그래”라고 따지셨다. 필자는 대답이 궁색했다. 이리저리 어슬렁거리는 행동 자체가 뭔가 매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필자는 나 혼자만 그런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원래 방랑자는 프랑스어의 ‘한량(fl<00E2>neur)’에서 비롯됐을 것이다. 이 단어는 19세기 파리에서 ‘게으른 신사’를 일컫는 문화적 핵심 요소의 하나였다. 어떤 일에 끼어들지 않은 채 멀찌감치 지켜보면서 시장과 길거리를 어슬렁거렸다.

 시인 보들레르는 한량과 ‘멋쟁이(dandy)’를 구별했다. 둘 다 어슬렁거리기는 마찬가지지만 댄디는 제대로 옷을 갖춰 입고 남에게 드러내 보이려는 게 다른 점이다. 따라서 숨어 있는 한량과 달리 댄디는 파리의 빼놓을 수 없는 거리 풍경으로 자리 잡았다. 이렇게까지 구별하는 것은 너무 이론적이고 딱딱한 느낌이다. 하지만 꼭 나누자면 필자는 한량임이 분명하다. 무엇보다 멋쟁이가 되려면 돈이 많이 든다.

 서울은 멋쟁이로 넘쳐난다. 아마 세계에서 댄디가 가장 집중된 도시가 아닐까 생각한다. 가로수길이나 홍대 앞은 돋보이게 차려입고 거리를 활보하는 젊은 멋쟁이들이 대세다. 요즘은 블로거나 거리 사진사들이 다가와 사진을 찍어주면 우쭐해하는 댄디가 적지 않다고, 패션 네트워크를 운영하는 한 친구가 귀띔한다.

 하지만 왜 아무 이유 없이 서울을 어슬렁거리지 않겠는가? 시간 낭비처럼 여겨질지 모르지만 필자는 거리를 걸으며 많은 것을 배운다. 특히 서울의 북동쪽이 그렇다. 혜화동은 예쁘고, 동묘 앞은 매력적인 곳이다. 세운상가에서 충무로에 이르는 길에는 한국의 개발역사가 서려 있다.

 필자는 한옥이 모여 있는 익선동 부근 종로3가의 팬이다. 고도성장한 서울의 한복판에 아직 이런 곳이 남아 있다는 사실이 황홀하다. 마치 고층빌딩이 빽빽한 열대우림에서 시원한 공터를 만나는 기분이다. 그런 기막한 한옥을 왜 싼값에 빌려준다는 광고 전단이 나도는지 의문이다. 그 부근에는 필자가 호기심에 찾은 천도교 중앙대교당도 있다. 신자들은 천덕송을 부르고 줄지어 예배를 올렸다. 단지 십자가가 없을 뿐이지 기독교와 똑같아 보였다. 그리고 한 할머니 신도가 다가와 천도교의 역사와 신앙에 대해 열심히 이야기했고, 그녀는 그녀 세대가 마지막 신도가 되지 않을까 걱정했다.

 필자는 혼자 일하는 직업을 갖고 있다. 자신의 일정을 마음대로 짜는 사치를 누린다. 거리를 어슬렁거리다 뭔가 쓰고 싶은 것을 찾으면 카페에 들러 글을 쓴다. 마치 어슬렁거리는 게 직업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하지만 천도교의 경전을 읽지 않아도 우연히 들른 교회에서 훨씬 더 생생한 천도교의 본모습을 본 게 아닐까.

 목적 없는 배회는 또 다른 매력이 있다. 인간은 목적을 위해 산다고 한다. 시험에 합격하려 공부하고, 돈을 벌기 위해 일하고, 별로 내키지 않지만 상사의 눈에 들기 위해 기를 쓴다. 이 수많은 일이 과연 우리가 자유롭게 선택한 것일까? 당신이 거리를 어슬렁거리며 물끄러미 지켜본다면 수많은 사람이 그런 세계에 갇혀 사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신이 그런 일상에서 잠시나마 떨어질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신나는 일인가.

다니엘 튜더 이코노미스트 서울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