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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을 어떻게 스톱시켰나

중앙일보

입력

최근 한국전자통신연구원 함병승 박사가 세계 최초로 빛을 고체 속에 정지시키는데 성공해 화제가 됐다. 광(光) 기억소자나 미래의 양자컴퓨터를 만드는 기초를 제공할 획기적인 연구로 평가받았다.

'빛이 정지한다'는 것은 진공에서 1초에 30만㎞나 날아가던 빛 알갱이(광자) 가 그자리에 서는 것이 아니다. 함박사는"빛이 멈췄다는 것은, 빛이 에너지로 바뀌며 고체 원자에 흡수돼 고체 안에 그대로 머물러 있다는 뜻"이라고 설명한다.빛의 상태로는 멈추는 것이 불가능하고, 대신 에너지로 모습을 바꾸며 멈추는 것이다.

이는 특수한 물질에서만 가능하다.보통의 물질도 빛을 에너지 형태로 흡수하지만 금방 도로 빛으로 내놓기 때문이다.

'멈춘다'에는 또'다시 움직일 수 있다'는 조건이 붙는다. 함박사의 실험에서는 고체 안에 머물던 빛이 외부에서 다른 빛을 쬐어주자 다시 움직였다. 움직이기 시작한 빛은 원래의 빛과 파장, 움직이는 방향 등 모든 것이 똑같아 "원래의 빛이 섰다가 다시 움직인다"고 해석하는 것이다.

이론적으로 이런 현상은 예견돼 왔지만 실제 실험실에서 관측하려면'검은 공진(dark resonance) '이라는 특수 현상을 일으키는 물질 등이 필요해 이제껏 이뤄내지 못했다.

검은 공진이란 레이저를 하나만 어떤 물질에 쬐어주면 완전히 흡수되지만, 파장이 거의 같은 다른 레이저를 추가로 쬐면 두개의 레이저빛 모두 전혀 흡수되지 않고 통과하는 현상을 말한다. 이런 물질이어야만 빛을 내부에 머무르게 할 수 있다.

함박사는 실험에서 검은 공진을 일으키는 Pr:YSO(프라세오디뮴 이트륨 실리케이트) 라는 물질에 두개의 레이저를 쏘아 둘다 통과하게 하다가 한쪽을 껐다.

그러자 '검은 공진'을 일으키는 원자들의 특수한 작용 때문에 켜진 레이저 빛이 에너지로 바뀌어 고체 안에 머물게 됐다. 이 상태에서 껐던 레이저를 켜니 에너지 상태로 갇혔던 빛이 다시 원래 움직이던 방향으로 진행하며 물질 밖으로 나왔다. 고체 안에 빛이 멈췄던 것이다.

함박사는 "검은 공진을 일으키는 물질 속에서 빛이 세부적으로 어떤 과정을 거쳐 멈추는지는 여러가지 이론이 있다"며 "실험을 거듭하면 세부 과정까지도 밝혀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권혁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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