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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부터 2013년 까지 it shoes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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잇 백(it bag). 굳이 해석하자면 꼭 가져야 하는 바로 그 가방이란 뜻이다. 실제론 가방 브랜드의 공격적인 마케팅 덕분에 너도나도 다 하나씩 드는 그해의 유행 가방 정도로 받아들여진 지 오래다. 특히 최근엔 브랜드보다 나에게 맞는 가방을 메겠다는 개성파가 늘면서 잇 백 시대가 저물고 있다는 말이 조심스레 흘러나온다. 그러나 잇 슈즈(it shoes)의 열기는 여전하다. 지난 20여 년간 국내 여성을 매혹시켜온 잇 슈즈를 시대별로 정리했다.

윤경희 기자

국내에 잇 슈즈가 처음 등장한 건 1990년대다. 시대에 따라 비슷하게 생긴 신발이 유행한 적은 있지만 특정 브랜드의 특정 모델 신발이 거리를 메운 것은 이때부터다. 90년대를 풍미한 건 이탈리아 럭셔리 브랜드인 살바토레 페라가모(이하 페라가모)의 바라 슈즈와 닥터마틴·팀버랜드의 워커였다.

 페라가모의 바라 슈즈는 리본과 버클이 달린 굽 3㎝ 높이의 통굽 펌프스(끈·고리 없이 발등이 깊게 파인 신발)다. 90년대엔 이 신발을 신지 않은, 아니 신고 싶어 하지 않는 여대생을 찾기 힘들 정도로 선풍적 인기를 끌었다. 긴 생머리에 헤어밴드를 꽂고 깔끔한 원피스나 주름치마를 같이 입는 게 바라 슈즈 신는 공식이었다. 이른바 ‘청담동 며느리 패션’이다. 드라마 ‘마지막 승부’로 스타덤에 오른 심은하의 청순한 스타일을 떠올리면 된다.

 또 다른 한편에선 당대 최고의 가수로 꼽히는 서태지와 아이들식의 힙합패션이 남녀 모두에 인기를 얻었다. 몸통이 통째로 들어갈 정도로 통이 넓은 힙합바지가 유행했는데, 여기엔 발목까지 올라오는 팀버랜드나 닥터마틴 워커를 같이 신었다.

 2000년대 접어들어 패션계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건 미국 드라마 ‘섹스 앤 더 시티’다. 98년 시작해 2004년 종영한 이 드라마에서 주인공 캐리(세라 제시카 파커 분)를 포함한 네 여자의 패션은 세계적 이슈가 됐다. 국내에도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 드라마 이후 스틸레토힐(뾰족한 앞코에 가늘고 높은 굽을 가진 구두)이 진정 여성을 위한, 여성이 원하는 신발로 재조명됐다. 극중 캐리가 열광한 브랜드인 지미 추와 마놀로 블라닉은 단번에 시대의 잇 슈즈로 떠올랐다.

2008년 개봉한 동명의 영화에서 캐리의 남자친구 빅이 캐리에게 다이아몬드 반지 대신 보석이 박힌 마놀로 블라닉 구두로 청혼하는 장면은 숱한 여성의 탄성을 자아냈다. 이 장면은 지난해 큰 인기를 모았던 국내 드라마 ‘신사의 품격’에서 장동건이 김하늘에게 지미 추 샌들을 신겨주며 청혼하는 것으로 변주됐고, 결국 품절현상을 빚었다. ‘섹스 앤 더 시티’의 인기를 등에 업고 2005년 국내에 들어온 마놀로 블라닉은 100만원을 호가하는 가격에도 유행 구두가 됐다. 빅이 프러포즈한 구두는 국내서 500켤레나 팔렸다.

 200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국내 디자이너 브랜드 시장이 열렸다. 최정인·이보현 등이 내놓은 향·슈콤마보니·나무하나·지니킴 등은 화려하고 개성 있는 디자인 덕분에 해외 브랜드 못지않은 인기를 얻었다. 갤러리아백화점의 여성 신발 판매량을 봐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슈콤마보니는 2007년부터 2011년까지 매출 5위 안에 들었다.

 201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여성성을 강조한 구두보다 캐주얼하고 중성적 이미지가 인기를 끈다. 고현진(의상디자인전공) 건국대 교수는 “학생들에게 ‘지금 가장 멋있다고 생각하는 패션 스타일을 갖고 오라’고 주문하면 몇 년 전만 해도 섹시한 스타일을 가져왔다”며 “그러나 요즘은 대부분 중성적 이미지의 스타일을 가져온다”고 말했다. 오토바이 탈 때 입는 가죽 바이크 재킷에 다리에 딱 달라붙는 스키니 팬츠를 입고 굽이 없는 플랫 슈즈나 스니커즈(운동화)를 신는 식이다.

그는 “체형이 서구화된 영향”이라고 분석했다. 전보다 다리가 길어져 굽 낮은 신발도 무난하게 소화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또 보수적인 여성상보다 중성적인 스타일을 매력적으로 바라보는 사회 분위기도 한몫했다. 정장 아래 나이키나 아디다스를 신고 출근하는 일명 ‘운도녀(운동화를 신은 도시 여자)’도 나타났다.

 2011~12년 봄·여름 슬립 온 슈즈(끈 없는 스니커즈)의 열풍은 이런 분위기와 맞닿아 있다. 탐스와 빅토리아 슈즈 등의 인기 브랜드에는 문의전화가 하도 많아 직원이 전화 받다 힘들어 울음을 터트릴 정도였다. 굽 있는 운동화인 웨지힐 하이톱 스니커즈는 지난해부터 인기몰이 중이다. 각선미를 살려줘 보통 운동화를 신을 때보다 훨씬 스타일을 살릴 수 있다는 게 인기 요인이다. 아쉬가 대표적이다.

 잇 슈즈는 어떻게 만들어질까. 잇 백과 마찬가지로 연예인의 영향이 가장 크다. 트렌드에 민감한 이들은 국내에 아직 들어오지도 않은 할리우드 스타가 신은 브랜드 신발을 공수해 신기도 한다. 고소영이 2010년 신혼여행 갈 때 신었던 아쉬가 대표적이다. 고소영의 공항패션 사진이 퍼지며 폭발적 인기를 끌었다. 2010년 이후 3년간 줄곧 갤러리아백화점 여성신발 부문 매출 1위를 차지했다.

최근엔 날씨가 주요 변수로 떠오르기도 했다. 2010년 이후 이른바 ‘국민 신발’이 된 양털부츠 브랜드 어그와 고무부츠 헌터가 대표적이다. 이 두 브랜드 모두 처음엔 ‘상감마마 신발’이라거나 ‘수산시장 장화’라는 비아냥 섞인 별칭으로 불렸다. 패션을 아는 사람이라면 피해야 할 신발로 취급당했지만 강추위와 폭우의 영향으로 국민 신발이 됐다. 기능성이 심미성을 누른 경우다.

 그렇다면 올해의 신발은 뭘까. 김은지 코스모폴리탄 패션디렉터는 크리스찬 루부탱의 펌프스 힐(발등이 드러나는 디자인의 굽이 높은 구두)을 꼽았다. 루부탱 구두는 바닥을 빨갛게 만든 것이 특징이다. 국내 수제화가 대부분 바닥을 빨갛게 만든 건 다 루부탱 구두를 롤모델로 삼아서다. 김 디렉터는 “구두도 백처럼 개성을 드러낼 수 있는 걸 찾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다”며 “루부탱이나 주세페 자노티, 타비사 시몬스 같은 디자이너 구두가 편집숍을 통해 국내에도 들어와 있는 만큼 조만간 잇 슈즈가 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여심 녹인 영화 속 명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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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더러운 구두 닦아주는 그 남자의 넥타이

섹스 앤 더 시티 - 2008년 작.
마이클 패트릭 킹 감독. 사라 제시카 파커 주연.

7년간 이어온 드라마 속에서 지미추와 마놀로 블라닉, 크리스찬 루부탱 등의 구두는 주인공 캐리 못지않은 또 하나의 주인공이었다. 드라마를 스크린에 옮긴 동명의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을 꼽으라면 아마 캐리의 남자친구 빅이 준비한 신혼집의 널찍한 드레스룸 아닐까. 캐리가 환호를 지른 것은 수십 켤레의 구두를 하나하나 다 돋보이게 진열할 수 있는 구두 전용장. 비가 오면 구두 상할라 차라리 맨발로 거리를 걷는 캐리에게 이 드레스룸은 빅이 그만큼 자신을 잘 이해하고 있다는 걸 확인하는 상징이다.

 

마리 앙투와네트 - 2006년 작.
소피아 코폴라 감독. 커스틴 던스트 주연.

이 영화에서 커스틴 던스트는 여성이 부릴 수 있는 사치의 끝을 보여준다. 그 중심에 있는 것이 구두다. 현대적 감각으로 재해석한 마놀로 블라닉의 화려한 18세기형 구두들은 그녀의 채우지 못한 욕망을 보여주는 수단으로 등장한다. 마놀로 블라닉 구두와 함께 화제가 된 건 컨버스 운동화다. 수많은 구두를 앞에 두고 무엇을 신을까 고민하는 장면에서 저 뒤쪽에 벗어놓은 연보라색 ‘컨버스 올스타 1923 척 테일러’가 보인다. 왕비가 되기 전 평범한 10대 소녀였다는 걸 보여주는 장치로 등장했다.

중경삼림 - 1994년 작.
왕자웨이(왕가위) 감독. 린칭샤(임청하)
진청우(금성무) 주연.

킬러 린칭샤는 진청우와 만나 “쉬고 싶다”며 호텔에 가자고 한다. 순진한 진청우는 잠든 그녀의 신발을 벗겨준다. 그리고 방을 나오려는 찰나 오래 걸어 흙투성이가 된 린칭샤의 하이힐을 본 진청우는 걸음을 멈춘다. ‘그녀처럼 아름다운 여자는 구두가 깨끗해야 한다’란 독백을 하며 화장실에 앉아 자신의 넥타이로 구두를 닦아 놓는다. 잠에서 깨어나 깨끗해진 구두를 바라보는 린칭샤의 오묘한 표정. 많은 여성이 비슷한 생각을 했을 것이다. 저런 남자를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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