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과 기술 톱니처럼 맞물려야 명품시계 탄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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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급 시계 제작에 쓰이는 ‘에나멜링’의 장인 아니타 포르셰

‘투르비옹’ ‘문페이즈’…. 최고급 시계로 인정받으려면 ‘이 정도는 갖춰야 한다’는 시계 부속품 이름이다. ‘투르비옹’은 중력의 영향을 최소화해 시간 오차를 줄이는 장치이고, ‘문페이즈’는 차고 기우는 달의 모습으로 시간의 흐름을 보여주는 그런 장치다. 지난 수년간 고급 시계 트렌드에서 기술력과 관련해 줄기차게 오르내린 소재들이다.

이런 기술적 장치와 함께 시계 시장에서 고급품의 주요 판단 기준이 있다. ‘예술성’. 올해 국제고급시계박람회(SIHH)에서도 수많은 브랜드가 ‘시계의 예술적 완성도’를 내세웠다. 하지만 예술성을 평가하는, 명확히 규정된 기준은 없다. 그럼에도 시계 업계가 공통으로 인정하는 예술적 기법이 하나 있다. ‘에나멜링’이다. 미네랄 알갱이와 염료를 섞어 열처리 하는 장식 기술이다. 내로라 하는 시계 브랜드가 앞다퉈 에나멜 장식을 자사의 최고급 시계에 도입하려 애쓰다 보니 최고급 시계의 예술적 완성도를 평가하는 기준이 됐다.

30년 넘게 이 분야 장인으로 일해온 아니타 포르셰(58)를 만났다. 스위스 시계 브랜드 피아제와 많은 작업을 함께한 그는 파텍필립이나 샤넬 같은 브랜드와도 공동으로 일한다. 수많은 고급 시계 브랜드, 명품 브랜드에서 요청이 끊이지 않아 좀처럼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그를 중앙일보가 만났다. SIHH 현장에 그를 초대한 브랜드는 피아제다. 포르셰는 VIP에게만 선보이는 작품을 비롯, 2005년부터 피아제의 에나멜 시계를 만들어왔다.

포르셰는 “예술과 기술이 정확히 맞아떨어져야만 완성되는 최고급 시계 기술이 에나멜링”이라고 소개했다. 그는 피아제 작품을 예로 들었다. “에나멜로 시계판에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고 그 위에 다이아몬드를 박아 마무리하려면 시계 장인과 에나멜 장인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호흡을 맞춰야 한다”고 했다. 에나멜링은 초고온으로 작업해야 하는데, 에나멜 시계판에 다이아몬드를 잘못 세팅하면 몇 달에 걸친 에나멜 작업이 수포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그는 “요즘 시계 제작자들이 너도나도 에나멜에 관심을 가지면서 수준이 하향 평준화되고 있다”고 꼬집었다. 인내를 요하는 고된 작업이라 숙련된 장인이 몇 없는데도 고급 시계 수요에 맞춰 급조된 에나멜러들이 작업에 투입되기 때문이란 것이다. 그에 따르면 최고급 시계에 적용할 수준에 이른 에나멜 장인의 수는 손에 꼽을 정도라고 한다. 30년 넘게 작업해 온 그도 이제 서른 살인 제자 한 명만 데리고 있다. “피아제 같은 브랜드는 보석과 시계 두 분야에 강점이 있다. 고급 보석의 장식, 고급 시계의 장식 두 분야를 고려하면서 더 창의적인 디자인을 고안하고 나 같은 사람에게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제안한다. 서로의 창의성을 자극해 또 다른 경지에 이를 수 있게 도와주는 관계다. 이런 관계가 지속적으로 많아져야 수준 높은 에나멜 기법이 적용된 최고급 시계가 시장에 더 많이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에나멜 시계는 양보다는 질일 수밖에 없다.”

제네바=강승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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