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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행복기금, 과연 공평한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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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이태경
경제부문 기자

얼마 전 기자에게 온 한 통의 e메일 사연. 몇 년 전 이혼하고 초등학생 두 자녀와 함께 사는 최미혜(40·가명)씨는 지난해 전셋집을 옮길 때 받은 은행 대출금을 매달 꼬박꼬박 갚고 있다. 식당 월급 150만원으로 대출금 상환은 물론 생활비와 교육비까지 감당해야 하는 어려운 살림이지만 빚을 빨리 갚겠다는 일념으로 허리띠를 조이고 있다. 그런 그에게 ‘새 정부가 국민행복기금을 통해 연체자의 채무를 감면해 준다’는 정책은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다. 최씨는 “빚 잘 갚으면 오히려 손해 보는 세상이 돼서야 되겠느냐”고 e메일에 적었다.

 박근혜 정부의 가계부채 핵심 공약이 속도를 내고 있다. 채무를 30~50% 깎아준다는 방안까지 공개됐다. 그런데 전혀 예상치 못한 반발이 나오고 있다. 최씨처럼 빚을 잘 갚거나, 아예 빚이 없는 저소득층들이 형평성 논란을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 현대경제연구원이 13일 발표한 ‘저소득층 가계부채의 특징과 시사점’에 따르면 국내 저소득층(4인 가구 기준 소득 2000만원 미만) 412만1000가구 중 362만4000가구가 국민행복기금의 혜택을 받지 못할 것으로 추정됐다. 106만7000가구는 빚이 있어도 연체를 안 했고, 255만7000가구는 아예 빚이 없는 가구여서다. 기금의 핵심 수혜 대상은 1년 이상 대출 연체 경험이 있는 나머지 49만7000가구다.

 더 큰 문제는 빚 없는 저소득층의 살림살이가 더 어렵다는 점이다. 대출가구 평균 자산은 2억1000만원으로 비대출 가구(9800만원)보다 훨씬 많다. 월 평균 소득도 대출가구(69만원)가 비대출가구(57만원)보다 많다. 빚이 없는데 왜 더 못살까. 해답은 간단하다. 은행 대출도 어느 정도 소득과 재산이 있어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준협 현대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대출 없는 저소득층은 은행 문턱에도 가지 못하는 극빈층”이라고 말했다.

 이런 이들을 제쳐두고 연체 채무자들을 대대적으로 구제하는 건 아무리 봐도 공평하지 않다. 정부에서는 “도덕적 해이가 없도록 선별하겠다”고 강조하지만 금융전문가들은 선별이 제대로 될지 의문을 품는다. 2003년 카드사태 때 신용불량자 구제 과정의 전례 탓이다. 카드를 잔뜩 긁어 쓴 ‘과다소비형 신용불량자’와 정말 생활이 어려워 대출이 밀린 ‘생계형 신용불량자’를 제대로 구분하지 않고 무조건 빚을 탕감해 준 것이다.

 형평성 논란에서 벗어나려면 행복기금 출범 전에 생계형 신용불량자를 가려내는 시스템을 확실히 구축해야 한다. 그래야 힘들어도 빚 안 빌리고 살려고 노력하는 서민들이 역차별의 설움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날 수 있다.

이 태 경 경제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