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퀘스터 공포 누른 버냉키 ‘돈의 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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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뉴욕 증시가 사상 최대치를 경신한 5일(현지시간) 뉴욕증권거래소(NYSE)의 한 트레이더가 함박웃음을 짓고 있다. [뉴욕 AP=뉴시스]

‘연방준비제도(Fed)와는 맞서지 마라’.

 미국 월가의 투자 격언이 이번에도 맞아떨어졌다. 재정지출 자동삭감 조치인 ‘시퀘스터’ 발동에도 벤 버냉키 연준 의장의 말 한마디에 다우지수가 사상 최고치로 올라섰다. 5일(현지시간) 다우지수는 전날보다 0.9%(125포인트) 오른 1만4253.77에 거래를 마쳐 2007년 10월 9일의 최고 기록(1만4164.53)을 넘어섰다.

미국 여야가 정쟁으로 시퀘스터 발동을 막지 못하자 버냉키는 지난주 두 차례 의회에 출석해 양적 완화 정책을 고수하겠다고 못 박았다. 그 덕분에 시퀘스터 공포로 잔뜩 움츠러들었던 투자심리가 다시 기지개를 켰다. <관계기사 b8면>

 안팎의 호재도 버냉키 발언에 힘을 실어줬다. 경기 회복의 발목을 잡아온 주택시장엔 본격적으로 온기가 돌기 시작했다. 1월의 미국 집값은 1년 전보다 9.7% 올랐다. 2006년 4월 이후 7년 만에 가장 큰 폭이었다. 집값은 11개월 연속 오름세를 이어가고 있다. 1월 신규 주택 건설 또한 전년보다 24% 늘었다. 미국 경기에 가장 큰 변수 중 하나인 부동산이 살아나고 있는 것이다.

 2월 제조업지수 역시 1년8개월 만에 가장 높은 수준을 기록했다. 소비지출도 지난해 11월 이후 3개월 연속 증가세를 이어가고 있다. 그 덕에 민간부문 일자리도 꾸준히 늘고 있다. 중국 정부도 올해 성장률 목표를 7.5%로 잡고 경기부양책을 펴겠다고 밝혔다.

 주력 기업들의 실적도 개선 추세다. 블룸버그통신은 다우지수에 포함된 30개 대기업의 올해와 내년 순익이 9% 이상 늘어날 것으로 예상했다. S&P500 지수 기업의 내년 주당 순익도 120달러를 넘어 2008년의 두 배에 이를 것으로 추산됐다.

이익이 늘어나는 속도보다 주가 오름세가 더디다 보니 주가수익비율(PER)도 2007년에 비해 낮다. 다우지수 30개 기업의 PER은 현재 13배 수준으로 2007년에 비해 14% 낮고 20년 평균에 비해서도 16% 밑돌고 있다. 그만큼 주가가 더 오를 여지가 있다는 얘기다.

 시장엔 낙관론자가 많아졌다. 버크셔해서웨이 워런 버핏이 대표적이다. 그는 4일 “다우지수가 사상 최고치에 근접하고 있지만 시장은 여전히 투자 가치가 있다”며 “주식을 계속해서 사들이고 있다”고 말했다.

초저금리 기조가 지속돼 증시로 쏟아져 들어올 ‘실탄’도 아직 충분하다는 예상도 있다. 투자자문사 트림탭스 리서치에 따르면 지난 1, 2월 두 달 동안에만 551억 달러가 증시로 흘러들었다.

초저금리 기조가 지속되는 상황에서 주가가 오르면 증시로 몰려들 자금이 많다는 것을 보여주는 수치다.

 에너지 측면에서도 미국 경제에 유리한 소식이 잇따라 날아들고 있다. 미국 내 셰일가스 생산이 점점 늘면서 서부텍사스유(WTI) 가격이 떨어지고 있다. 지난달 초 배럴당 98달러에 근접했던 WTI는 현재 91달러를 밑돈다. 에너지 비용이 덜 들면 미국 기업들의 원가 경쟁력이 높아지고, 가계는 소비 여력이 커진다. 이에 더해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의 사망 소식이 전해졌다. 베네수엘라는 확인된 원유매장량이 3000억 배럴에 이르는, 세계 최대 원유보유국이다. 반미 지도자가 사망한 베네수엘라가 향후 미국에 개방적인 정책을 들고 나오면 미국 내 에너지 가격은 더 하락할 수 있다.

 그러나 ‘산이 높으면 골도 깊다’는 경계론도 고개를 들고 있다. 최근 주가를 끌어올린 원동력이 근본적으로 연준의 돈 풀기 정책에 있었다는 게 가장 큰 이유다. 주가에 거품이 끼었을 개연성도 높다는 얘기다. 시퀘스터 충격도 시간이 갈수록 누적된다. 게다가 3월 27일 이후 정부 예산이 의회 승인을 받지 못한 상태여서 여야 대립이 격화하면 1995년과 같은 정부 일시 폐쇄 사태가 재연될 수 있다. 5월 17일엔 미국 정부 부채한도도 다시 찬다. 유럽 재정위기도 여전히 해체되지 않은 시한폭탄이다.

정경민 특파원

◆ 시퀘스터(sequester)

미국의 재정지출 자동삭감. 2011년 8월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공화당이 부채 한도를 늘리며 합의한 사안으로 애초 올해 1월 1일부터 강행될 예정이었으나 재정절벽을 피하기 위해 미뤄졌다. 이달 1일부터 시행돼 미 연방정부는 지출을 연간 1100억 달러씩 10년간 총 1조2000억 달러를 자동삭감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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