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대현 교수의 스트레스 클리닉] ‘사는 게 재미없어 자살 충동 든다’는 31세 미혼 여성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21면

윤대현
서울대병원 강남센터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Q. 저는 31세 미혼 여성입니다. 평균 키와 몸무게를 가진, 나름 예쁜 데다 동안이기까지 한 외모를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는 게 전혀 재미가 없습니다. 부모님은 어릴 때부터 아주 엄격했고 제게 따스한 말 한마디 건넨 적 없습니다. 전 최대한 남에게 피해 안 끼치고 할 일은 알아서 하려고 노력을 엄청 했습니다.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어서죠. 학창 시절엔 저 혼자 알아서 공부하며 상위권에 들었고,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았지만 용돈도 아껴 썼습니다. 멋 부리는 것조차 모를 정도였습니다. 한마디로 부모님께 심려 끼쳐 드린 일이 없다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부모님은 사고뭉치 남동생을 훨씬 아끼고 물심양면 지원하시더군요. 제가 사람을 잘 사귈 줄 모르기 때문일까요. 제 할 일만 너무 열심히 한 우직한 성격이 이런 결과로 돌아오는 건가요. 저도 사랑받고 인정받고 싶습니다. 이젠 바른 행동이 너무 싫습니다. 자꾸 삐뚤어지고 싶고, 어떤 때는 자살 충동까지 듭니다. 집에서 제 편은 아무도 없는 것 같습니다. ‘왕따’나 다름없지요. 심지어 남자친구도 연하라 믿고 의지하기에 부족합니다. 답답합니다. 결혼을 해야 할까요. 그렇게라도 해서 집을 나가면 이런 기분이 사라질까요.

A. ‘재미’의 사전적 의미는 ‘아기자기하게 즐거운 기분이나 느낌’입니다. 현대인에게 재미는 선이냐 악이냐만큼 중요한 판단 기준이 된 듯합니다. 사람들은 늘 묻습니다. “일하는 거 재미있나” “결혼 생활은 재미있니”, 이렇게요. 재미라는 느낌의 경험이, 삶이라는 콘텐트의 가치를 평가하는 잣대가 돼버렸습니다. 많은 사람에게 인생의 목표를 물으면 행복이라 답합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이렇게 재미에 집중한다는 건 행복을 느낌 수준에서 정의하고 있다는 겁니다. 말이 좀 어려운가요. 행복은 즐거운 기분, 그러니까 재미라고 정의한다는 말입니다.

 독자분 사연을 보니 어릴 때 어른들 만류에도 떼를 써서 소설 『춘희』를 읽었다는 이야기가 나오더군요. “춘희가 그런 여자란 걸 몰랐다. 춘희란 이름이 너무 예뻤다”고 하셨네요. 어린 나이였지만 소설이 주는 감성에 대한 반응이 짙으셨나 봅니다. 마음의 통증을 사연으로 옮길 때 춘희의 기억이 다시 재생되었으니깐요. 춘희 스토리에 감성적 공감을 했다는 거겠죠.

 춘희는 프랑스의 고급 창녀 마르그리트와 좋은 집안 아들 아르망의 슬픈 러브 스토리입니다. 러브 스토리엔 사랑을 막는 장애물의 존재와 그로 인한 갈등, 그리고 소통 장애로 인한 오해가 기본 요소로 들어 있습니다. 아르망은 첫눈에 마르그리트에게 반하고 둘은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마르그리트는 창녀 생활을 청산하고 프랑스 파리 교외에 둘만의 보금자리를 차립니다. 마르그리트는 폐결핵에 걸렸지만 아르망의 따뜻한 간호로 회복할 기미가 보이고요. 이때 둘 관계를 알게 된 아르망의 아버지는 둘의 관계를 반대합니다. 부친은 마르그리트에게 아들을 위해 떠나 줄 것을 호소하고, 아르망을 사랑한 마르그리트는 사라집니다. 마르그리트가 소리 없이 떠나자 아르망은 배신감을 느낍니다. 마르그리트가 죽었다는 소식에 파리에 온 아르망은 그제야 진실과 마주합니다. 왜 떠날 수밖에 없었는지, 그리고 병과 싸우며 아르망이 오기만을 기다리는 사랑의 갈망을 말입니다. 하지만 진실을 알게 된 시점엔 이미 사랑하는 그녀는 세상에 없는, 아주 전형적인 슬픈 러브 스토리입니다.

 독자분의 고통은 춘희처럼 사랑의 고통입니다. 사랑에 대한 갈망은 모두에게 존재합니다. 굳이 일과 사랑으로 나누어 보자면, 일이 먼저고 그 다음 이차적으로 사랑이 필요한 사람도 있습니다. 반면 사랑 자체가 삶의 첫 번째 가치인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에겐 일이란 사랑받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의미가 강합니다. “저도 사랑받고 인정받고 싶습니다. 이젠 바른 행동이 너무 싫습니다. 자꾸 삐뚤어지고 싶고, 어떤 때는 자살 충동까지 듭니다”란 독자분의 말에서 사랑에 대한 갈망과 절망이 동시에 느껴집니다.

 춘희 같은 러브 스토리를 보고 있으면 아르망의 부친이라는 외부 요인으로 발생하는 두 남녀의 오해와 갈등이 안타깝고 애잔한 슬픔의 감성 반응을 일으킵니다. 하지만 냉정하게 보면 둘이 정말 사랑했나, 하는 의구심도 듭니다. 사랑은 단순한 느낌 이상으로 그 에너지의 방향성이 중요합니다. 아무리 큰 사랑의 느낌이 있어도 사랑의 방향이 상대방이 아닌 나를 향하고 있다면 그 사랑의 느낌은 오래 유지되기 힘듭니다. 아르망의 배신감은 마르그리트의 진심을 이해 하지 못한, 감성 에너지의 방향성에 문제가 있다는 말입니다. 공감이란 감성 에너지를 내가 아닌 상대방에게 보내는 작업입니다.

 불행보다 무서운 게 행복 중독입니다. 세상 모든 일을 ‘재미’로만 묻고 판단하는 우리네 모습이 행복 중독의 한 증상입니다. 방송·정치 콘텐트와 수많은 서적에서 행복을 끝없이 이야기하고 있으나 묻지마 범죄와 자살 등 불행 지수는 올라만 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행복에 대한 강박만 더해 가는 느낌입니다.

 전 정신건강의학과 의사지만 우울증이란 단어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우울하다는 감성을 병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죠. 의학적 견지에서 협의의 우울장애는 적극적인 치료가 필요한 상태지만 우울하단 느낌은 모든 사람이 느끼는 매우 정상적인 감성 반응입니다. 전 사람의 기본적 감성이 약간 우울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름다운 여성의 피부도 결국은 주름이 지게 되고, 힘센 남자도 약해지며, 건강을 자랑하는 이도 결국은 세상을 떠나게 돼 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우울은 우리 감성 시스템이 느끼는 매우 자연스러우면서도 성숙한 감성입니다. 행복의 반대말이 결코 우울이 아닌 겁니다. 우울하지만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습니다.

 이쯤 되면 행복에 대한 정의가 중요합니다. 행복을 재미라는 즐거운 느낌으로만 정의하면 삶이 불행하게 느껴지기 쉽습니다. 감성은 본질적으로 굴곡이 심한 불안정체이기 때문이죠. 재미보단 ‘삶의 만족감’이 행복의 좋은 정의라 생각합니다. 만족감은 내 삶의 가치를 이야기합니다. 우울해도 내가 추구하는 삶의 흐름대로 내가 살고 있다면 행복할 수 있는 거죠. 이럴 때 일어나는 감성 반응이 ‘근사하다’입니다. 재미도 없고 우울하지만 근사한 삶이 가능합니다. 삶의 방향이 내 소중한 가치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면 행복할 수 있는 것, 무섭게 인생을 즐길 수 있는 전략이지요. 가치 중심적 삶은 변덕쟁이 감성의 영향을 훨씬 덜 받습니다.

 전 사연을 준 독자분 당신이 좋습니다. 일보다 사랑에 가치를 두는 따뜻한 인간이기 때문이죠. 그리고 섬세한 감성도 좋습니다. 섬세하기에 관계에 상처를 잘 받고 통증을 느끼는 겁니다. 둔하고 싶다고요. 둔한 감성은 세상을 제대로 느낄 수 없습니다. 단지 당신은 너무 지쳐 감성 에너지의 흐름이 자기를 향하고 있어요. 자기를 향한(self-direction) 감성 에너지가 강하면 상대방의 따뜻함을 느낄 수 없습니다.

 감성 에너지를 다시 돌리는 방법은 행복의 정의를 재미라는 느낌(feeling)이 아닌 가치에 두는 것입니다. 만약 마르그리트가 아르망 부친의 강요에 상처받아 감성 에너지의 흐름을 자기로 돌리지 않고 오히려 더 강력하게 남자 주인공을 사랑했다면, 외롭게 마지막 삶을 보내는 비극적 슬픔은 없었을 것입니다.

 힘내세요. 당신은 사랑받을 만한 존재이고 또 사랑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느낌이 아닌 가치입니다.

윤대현 서울대병원 강남센터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