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대통령 “식물정부 된다”vs 문 위원장 “국회 존중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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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이 4일 청와대에서 대국민담화를 발표하고 있다. 박 대통령은 정부조직법 개정안 처리 지연에 따른 국정 차질에 대해 사과하고, 야당에는 개편안의 조속한 처리를 위한 협조를 촉구했다. [최승식 기자]

4일 오전 10시 청와대에서 대국민담화를 발표하던 박근혜 대통령의 표정은 딱딱히 굳어 있었다. 어조는 단호했고 눈빛은 차가웠다. 5년 전 한나라당 공천 파동 때 “나도 속고 국민도 속았다”고 말하던 때를 연상시켰다.

 박 대통령은 “우리 경제가 한 단계 도약하고 질 좋은 일자리를 창출하려면 반드시 과학기술과 방송통신의 융합에 기반한 정보통신기술(ICT) 산업 육성을 통해 국가 성장동력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이것은 저의 신념이자 국정철학이고 국가의 미래가 달려 있는 문제”라며 “대한민국의 대통령으로서 국가의 미래를 위해 이 문제만큼은 물러설 수 없다는 절박한 심정”이라고 했다. 그는 민주당을 겨냥해 “수많은 소셜미디어와 인터넷 언론이 넘치는 세상에 정부가 방송을 장악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며 “과거 생각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본질에서 벗어난 정치적 논쟁으로 이 문제를 묶어 놓으면 안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열린 수석비서관회의에서도 “야당이 회동까지 거부하는 것은 대화를 통한 의견 접근보단 본인들의 요구가 관철될 때까지 움직일 수 없다는 생각이 더 강한 것 같다”고 비판했다. 그는 “내일(5일)까지 정부조직개편안이 국회를 통과하지 못하면 새 정부는 식물정부가 된다”며 “가능한 대화 채널을 모두 열어 처리될 수 있도록 수석들께서 최선을 다해 달라”고 주문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의 압박은 통하지 않았다. 민주당 문희상 비상대책위원장은 박 대통령의 담화가 끝나자 오전 11시30분 국회 당 대표실에서 회견을 열었다. “어제 2시 청와대 회동에 일방적으로 초청해 놓고 아침부터 대변인을 통해 계속 원안 고수를 주장하는 건 마치 여우가 두루미를 초청해 놓고 두루미에게 접시에 담긴 수프를 먹으라는 격”이라고 반격했다. “박 대통령이 진정으로 상생·민생정치를 바란다면 국회의 입법권을 존중해 달라”고도 했다.

 동석한 우원식 원내수석부대표는 “3일 밤 협상에서 우리가 많은 부분을 양보해 합의 서명 직전까지 갔지만 오후 10시쯤 이정현 청와대 정무수석이 국회로 온 뒤 새누리당 입장이 갑자기 바뀌어 결렬되고 말았다”며 “청와대가 국회를 무력화하지 말고 협상할 공간을 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서로 한 발씩 양보하기보단 상대방을 향해 무장해제를 요구하는 상황이다. 상대편이 결국 비켜설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고 정면 돌진하는 ‘치킨게임’ 양상을 방불케 한다. 새누리당에선 “정부조직이 마비되는 상황까지 가는 건 민주당도 부담스러워 조만간 물러설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강경론이, 민주당에서도 “국회선진화법 때문에 여당이 강행 처리할 방법이 없어졌기 때문에 이참에 야당을 무시하고선 아무것도 안 된다는 것을 보여 줘야 한다”는 강경한 목소리가 도드라졌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면서 대화와 협상을 주장하는 온건파들은 설 자리를 잃었다. 새누리당 이한구 원내대표와 민주당 박기춘 원내대표는 늦은 밤까지 비공개 접촉을 했지만 성과를 내지 못했다.

글=김정하 기자
사진=최승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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