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을 사랑한, 복잡했던 그녀를 추억하며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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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2호 27면

일리야 레핀의 ‘무소륵스키의 초상’(1881). [위키피디아]

지난 회에 이어 ‘내 인생의 음악’에 해당하는 선곡을 계속해 본다. 인생을 결부시키자니 음악 이전에 사적인 연고며 사연들이 자꾸만 눈과 귀를 가린다. 『세월의 거지』라는 제목의 시집을 낼 만큼 지난날의 내 삶은 불쌍한 거지의 그것이었는데 언제부터인가 너무나 멀쩡해져 버렸다. 멀쩡한 사람에게도 복잡한 상념이 가능하고 문학과 예술이 허용될까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지금, 이 멀쩡한 시점에 반추해 보니 아닌 것 같다. 자격이 없다는 생각만 든다. 그러니 모든 것이 추억이다. 문학도 음악도 그리고 인생도 추억이 되는 때가 찾아온다. 골병이 들도록 영혼이 아플 때 한꺼번에 인생을 다 살아버렸고 그 다음의 나날은 무한반복재생 테이프로 돌아간다. 늙은이들이 어째서 한 얘기 또 하고 또 하는지 알 것 같다.

[詩人의 음악 읽기] 내 인생의 음악 <2>

우선 사연이나 추억 따위에 지배되지 않는, 그야말로 순정한 음악적 감흥으로 떠올릴 곡이 있다. 모차르트의 ‘피아노 트리오 B플랫 장조 K502’의 2악장 라르게토에서 3악장 알레그레토 부분까지다. 한마디로 정적의 사운드다. 피아노, 바이올린, 첼로가 계속 소리를 내는데 음악은 멈춰 서 있다. 서른 살의 완숙한 모차르트에게 필요했던 심호흡일까. 음악적으로는 조성의 흔들림, 그러니까 바이올린이 선율을 펼칠 때 피아노가 자꾸만 단조로 끌고 들어간다. 듣는 이의 호흡도 따라서 멈춰지면서 집중상태로 돌입하는데 찾아온 방문객들의 객담이 너무 시끄러울 때 이 곡을 슬며시 틀면 예외 없이 잠잠해지곤 한다. 단, 조건이 하나 있다. 지금 말하는 이 곡의 명상적 분위기는 오직 1967년에 녹음된 보자르 트리오의 연주여야만 한다는 점이다. 다른 팀 연주를 여럿 찾아 들어봤는데 참 매끈하게도 빠져나간다. 내 추측에 다른 연주들이 오히려 모차르트에 충실한 것이고 보자르 트리오가 제멋대로 새로운 해석을 해버린 게 아닐까 싶다. 보자르 트리오는 노블하다. 그들의 연주로 하이든의 피아노 트리오들을 들어보라. 그 역시 아주 우아하게 하이든을 벗어난다.

교향곡의 기억들을 어떻게 쓸어 담을 수 있을까. 너무 많고 너무 거대한 감흥의 저장고가 그 속에 담겨 있다. 평생 동안 브람스 4번 교향곡 1악장의 쓸쓸한 파토스를 되뇌어 왔다. 쇼스타코비치 5번은 예술의전당 무대에서 기타옌코의 지휘로 경험했다. 전율이 인다는 것. 무르팍을 아프게 콱 움켜쥐어야 했다는 것. 차이콥스키 5번이나 베토벤 7번이나 생상스의 3번이나 말러 5번처럼 격정의 도가니탕을 펄펄 끓이는 곡들도 있다. 그런 중에도 특별한 자리를 차지하는 곡이 벤저민 브리튼의 심플 심포니다. 앞서 언급한 곡들에 비해 하염없이 소박, 조촐한 곡이건만 추억 때문이다. 병원 신세를 져야 할 만큼 신경이 쇠약하고 복잡했던 옛날의 어떤 그녀가 이 곡을 사랑했다. 심플이라는 제명이 작용한 것 같다. 단순을 사랑할 만큼 진짜로 단순한 세상의 머리 복잡한 엘리트들에게 위로를! 단순을 사랑했던 대가로 그녀는 학자도 작가도 되지 못했다. 지금도 여전할까? 그녀를 만나던 시절 나는 머리 나쁜 사람의 특권인 복잡함과 혼란스러움, 다른 말로 지적인 포즈를 최대치로 구가했었다. 그녀와 함께 비좁은 내 자취방에서 현학적인 대화를 나누며 듣던 심플 심포니.

청춘기의 나는 처절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믿었다. 그 반려가 무소륵스키(위 사진)였다. 그가 앓던 간질병을, 그가 감내해야 했던 홈리스의 삶을, 그가 기대었던 거대 취향을 연민 속에 사랑했다. 그의 가곡 모음집 ‘햇빛도 없이’ 속에 처절의 레시피가 다 들어 있다. 처절하다는 것은 감성, 지성 따위에 위치하지 않는다. 처절은 오로지 텅 빈 지갑, 잡다한 질병, 도움 받을 연고조차 만들 수 없는 모난 성격 속에 있다. 그런 생존적 처절이 문학과 예술의 출발점이라고도 믿었다. 그때 나도 비교적 처절의 근처에서 살았건만 무소륵스키가 되지는 못했다. 오히려 처절에서 탈출하고자 했고 결국 그것은 추억의 몫이 돼버렸다. 죽기 직전 병상의 친구들에게 무소륵스키가 남긴 말이 있다. ‘나처럼 불행한 사람이 또 어디 있을까?’ 그 유언을 알알이 느낄 수 있는 바이니 무소륵스키로 인해 아픈 사람이 더 아플 수 있기를!

처절의 측근으로, 하지만 출발점이 다른 감정 상태로 침통이 있다. 라벨의 왼손을 위한 피아노 협주곡은 침통하다. 실제로 오른팔이 잘린 피아니스트를 위해 작곡된 곡이기도 하고 인간을 황폐하게 만드는 전쟁 체험이 전편에 깔려 있기도 하다. 이 곡은 아주 오랫동안 병석에 누워 있어야 하는 사람을 위한 곡이라고 생각한다. 라벨은 묵직하고 처연한 오케스트라와 의외로 경쾌한 피아노를 병치시킨다. 젊다 못해 어리기까지 한 파스칼 로제의 피아노가 그 정황을 잘 포착해 낸다. 처음엔 자상으로, 이어서 녹내장으로 긴 안과병동의 시간을 겪어야 했던 시절이 떠오른다. 조금도 그립지 않지만 그래도 그때를 환기시키는 라벨을 듣는다. 침통할 때 기분을 가볍게 만들어 주는 방법이다. 경쾌한 침통, 그 아이러니가 곡에 담겨 있으니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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