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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의 우중충함은 어떻게 생명력 넘치는 초록빛이 되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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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마찬가지인지 모르지만, 한때 대학교 신입생들에게는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 있었다. 예컨대 님 웨일즈의 『아리랑』, 토머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 칼 포퍼의 『열린 사회와 그 적들』 같은 책들이었다.

그 중에 E. 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는 늘 빠지지 않던 영원한 필독도서였다. 이 필독도서를 읽지 않고 대학을 졸업한 사람들도 누군가 느닷없이 “역사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종소리 들은 파블로프의 개가 침 흘리듯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대답할 정도였다.

역사란 현재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
하지만 그 말을 듣고 누군가 진지하게 다시 “역사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무엇이라고 대답해야 할까? 이 물음에 정답은 없는 것이니 일단 다른 사람의 사례를 드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최근 『역사, 위험한 거울』(푸른역사)를 펴낸 한양대학교 사학과 김현식 교수는 이 물음에 대한 답을 한 권 분량의 책으로 준비하면서 그 첫 구절을 다음과 같이 시작했다. “그녀는 아름답고 총명했다.” 역사의 여신 끌리오를 일컫는 말일까? 이게 도대체 무슨 뚱딴지같은 말인가?

“역사는 무엇인가? 우리는 왜 역사를 공부하는가? 이런 물음들에 대한 대답을 좀더 절실하게 묻고 싶었습니다. 이 물음들에 제가 느끼는 만큼의 긴장감을 독자들에게도 전해주고 싶었던 것이죠. 그걸 저는 사랑이라는 형식을 빌어 표현했습니다. 저마다 사랑의 절실함은 존재하지 않습니까? 그 절실함으로 역사상의 아벨라르와 엘로이즈를 바라보라는 것, 이를 통해 역사란 무엇인가, 깨달아야 한다고 말하고 싶었죠.”

사실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어떤 대답을 찾으려고 『역사, 위험한 거울』을 펼쳤던 사람이라면 잠시 당황할 것이다. 이 책의 절반은 대학교 선생 D와 제자 A에 관한 이야기다. 선생 D는 서른아홉 살이고 제자 A는 스물 여섯 살이다. 2년 전 겨울, 뉴트롤스의 ‘아다지오’가 흐르는 대학 교정에서 둘은 처음 만나 사랑에 빠졌다. 그리고 이제 A는 점점 D에게서 멀어지려고 한다.

이 낯선 역사책은 이 시점에서 중세의 위대한 연인인 아벨라르와 엘로이즈의 이야기로 넘어간다. 사랑을 갈구하는 D는 그 연인의 사랑이 결국 추락했듯이 자신들의 사랑 역시 침몰할 것이라고 본다. 하지만 A는 다르다. A가 보기에 D는 아벨라르와 엘로이즈의 사랑을 오해하고 있다. 자, 그렇다면 과연 엘로이즈와 아벨라르의 사랑은 진짜 어떤 모습이었던가? 그 진실을 밝힌다면 D와 A의 사랑 역시 지속될 수도, 그 자리에서 끝날 수도 있는 셈이다.

“이 책은, 그러니까 아벨라르와 엘로이즈라는 역사적 인물을 통해 사랑이란 무엇인가 탐구해나가는 과정을 보여준 셈입니다. 물론 이 얘기를 논문처럼 쓸 수도 있죠. 하지만 그건 회색입니다. 이 회색에 생명의 초록빛을 입히는 과정이 바로 역사적 해석이죠. 그래서….”

그래서 누구도 D는 진짜로 A를 사랑했다, 혹은 사랑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없는 셈이다. 역사란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믿었던 사람들에게 김 교수는 역사란 현재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 그러니까 자문자답이라고 말한다. 자문자답을 통해 역사의 빈틈을 메꿔 나간다는 점에서 김 교수는 『치즈와 구더기』를 쓴 진즈부르그와 『마르탱 게르의 귀향』을 쓴 나탈리 제먼 데이비스 등의 연구 방법에 심증적으로 동의한다. 이쯤이면 많은 사람들이 눈치채겠지만, 이는 절대적 진리로서의 역사를 부정한다는 점에서 포스트모던 역사학을 떠올리게 한다.

이 책을 다시 재구성하면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복합질문에 대한 강의, 아벨라르와 엘로이즈의 사랑에 대한 두 가지 해석, 이 해석방법에 근거한 D와 A의 사랑이야기 쓰기 등 세 부분으로 나눠진다.

체제 상 D와 A의 사랑이야기가 전면에 부각되는 바람에 책을 펼친 독자들을 당황스럽게 만드는 경우가 많지만, 책을 읽어나가는 동안 독자는 양자택일의 절박한 처지에 놓이게 된다. 아벨라르와 엘로이즈의 사랑을 긍정할 것인가, 부정할 것인가. 김 교수는 자신의 연애 경험을 바탕으로 먼저 이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라고 강요한다. 독자가 그 중 하나를 선택하면 김 교수는 비로소 ‘역사란 무엇인가’에 대한 강의를 시작한다.

먼저 양자택일하라. 그러면 강의를 시작하겠다
“이 책의 결말은 수없이 많을 수 있습니다. 저는 다만 제 경우를 보였을 뿐이죠. 책을 읽은 독자들에게는 저마다의 결말이 있겠죠.”

회색의 우중충함은 어떻게 초록의 생명력으로 바뀔 수 있을까? 아벨라르와 엘로이즈의 사랑이라는 역사적 사건이 현재를 살아가는 연인들의 마음속에서 생생하게 살아 움직일 때 가능하다. 이 때 역사는 오래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인 보편적 지식의 체계로서 작동하는 셈이다.(김연수 / 리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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