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을 열며] 왜 올핸 달력 안줍니까

중앙일보

입력

해가 바뀌면 반드시 바꿔야 하는 게 달력이다.

그런데 올 연말에는 기업이나 금융기관들이 '긴축경영을 한다'며 달력 제작을 줄이는 바람에 달력 구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지난해보다 늘린 곳은 거의 없고 대부분 10~20% 씩 줄였다는 소식이다. 이 때문에 고객.거래업체 등으로부터 "올해는 왜 달력 안주느냐"는 불만을 많이 듣는다고 한다.

*** 수출 식적이 생존의 조건

달력 인심마저 박해지는가 싶지만 한편으로는 생각을 달리할 필요도 있다고 본다. 사실 달력은 방 방마다 걸어 놓을 일은 아니다. 괜히 여기저기 벽에 못 구멍만 만들어 놓을 게 아니라 거실에 하나만 걸어 두어도 충분하다. 한 집에 하나면 되는 것이다.

물론 아름다운 그림이나 사진이 들어 있는 달력은 그 자체로 일종의 실내 장식이 된다. 그러나 그에 들어가는 비용은 어찌할 것인가.

삼성.LG.SK 등은 매년 50만~1백만부를 찍고 다른 웬만한 기업들도 수만부에서 수십만부를 만드는데 보통 한 부당 1천원 이상 든다고 하니 그 경비도 만만치 않은 규모다.

작은 것이지만 '달력도 거품일 수 있다'는 인식 하나 하는 게 경제 선진국으로 한 걸음 다가서는 것 아닐까 싶다.

나라의 경제력을 평가하는 데에는 국민소득.총생산 등 여러 지표가 있지만 유용한 것 가운데 하나가 '경쟁력'이다.

우리나라처럼 좁은 땅에 많은 사람이 살면서 자원도 없는 나라는 달러를 벌어야 기름과 먹을 것을 사올 수 있으니 수출이 곧 생존의 조건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수출을 하려면 낯선 외국 땅에서 현지 기업을 포함한 세계 여러 나라 기업과 싸워야 한다. 제품의 품질과 가격으로 경쟁을 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당연히 경쟁력을 갖춰야 한다.이 경쟁력에 관해 세계 여러 연구기관들이 해마다 조사.발표를 한다.

그 중 가장 권위있는 곳이 스위스 국제경영개발원(IMD)과 세계경제포럼(WEF)이다.

알려졌다시피 올해 우리나라는 IMD 평가에선 49개 조사 대상국 중 28위, WEF 조사에선 75개국 가운데 23위를 했다. 그저 중위권이다.

그런데 이들 조사는 우리에게 두가지 희망도 주고 있다.

첫째는 덩치가 크다고 경쟁력이 높은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IMD 조사에선 미국.싱가포르.핀란드.룩셈부르크.네덜란드가,WEF 조사에선 핀란드.미국.캐나다.싱가포르.호주가 각각 1~5위를 차지했다. 우리보다 작은 나라가 많음을 한 눈에 알 수 있다.그렇다면 우리나라도 강대국은 몰라도 강소국은 될 수 있지 않을까□

둘째는 평가 항목이다. 이들 조사는 정부 효율성과 부패 정도,기업의 생산성과 기술 수준, 인적 자원 등을 주로 따진다. 자원이나 자본보다 시스템과 가치관(즉 제도와 생각)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원.자본이 부족한 우리나라도 한 번 해볼 만하지 않을까□

미국이나 유럽 같은 큰 시장에선 기업들이 내수만 잘 해도 되지만 우리나라 기업들은 수출을 해야 먹고 산다. 그런데 외국에 물건을 팔려면 조금이라도 값이 싸야 한다. 이 때문에 '짜다'는 소리를 들으면서 마른 걸레 쥐어짜듯 경비 절감을 하는 기업들이 사실은 애국자라고 본다.

*** '짜다' 소리 들어야 애국자

차제에 '연하장 안보내고 안받기 운동' 같은 것을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많은 경우 '근하신년'등 인쇄된 양식에, 손으로 쓴 글씨는 달랑 보내는 사람과 받는 사람 이름 뿐이다. 때로는 보내는 사람의 사인까지 인쇄한 경우도 있다.

아무리 감사의 표시이자, 새해 인사라고 하지만 '그럴 바에야 뭐하러 보내나'하는 느낌까지 든다. 물론 보내야 할 사람은 많은데 일일이 손으로 쓰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면 꼭 보내고 싶은 사람에게는 편지.전화 또는 e-메일로 하면 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보내는 사람이 아니라 받는 사람이다.

받는 쪽이 '안받아도 된다'는 너그러운 마음을 가져야 보내는 사람도 '연하장 복사' 의무에서 해방될 수 있다.

민병관 <산업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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