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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은 다 멋있더라아저씨, 할머니 … 누가 흔들어대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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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1호 09면

점잖게 양복을 빼입은 무용수 한 무리가 막걸리 한 됫박에라도 얼큰히 취한 듯 기분 좋게 몸을 흔든다. 흥겨운 비트에 맞춰 뛰고, 날고, 구르다 하나둘 쓰러진다. 허우적대다 간신히 몸을 일으키는가 싶더니 여기저기서 끼룩끼룩, 외로운 기러기 울음소리는 어느덧 처절한 절규로 변해 간다. 그러나 일어나야 한다. 날자 다시 날자꾸나-. 안은미컴퍼니의 2013 무브먼트 리서치 프로젝트 ‘아저씨를 위한 무책임한 땐쓰’에서 만날 수 있는 아저씨들의 몸부림 한바탕이다.
전문 무용수들이 6개월 동안 전국을 돌며 수집한 40~60세 아저씨들의 춤 동작을 각 잡힌 춤사위로 승화시킨 이 무대는 두산아트센터와 안은미컴퍼니, 대전문화예술의전당이 공동 기획한 프로젝트로 3월 1~3일 두산아트센터, 16일 대전문화예술의전당에서 관객이 직접 참여할 수 있는 무대로 펼쳐진다.
일반인들의 막춤을 안무화한 무브먼트 리서치 프로젝트는 올해로 3년째다. 첫해 할머니들의 움직임에 경의를 표한 ‘조상님께 바치는 땐쓰’, 이듬해 10대들의 일치단결 아이돌 사랑을 되새긴 ‘사심 없는 땐쓰’에 이어 이번에는 우리 시대 아저씨들의 몸짓에 주목했다. 무용가 안은미는 왜 저 평범한 이들을 무대 위로 올리는 걸까? 서울 서빙고동 안은미컴퍼니 연습실을 찾았다.

보통사람들의 막춤 3년째 무대 올리는 무용가 안은미

1 39아저씨들을 위한 무책임한 땐쓰39 공연을 위해 전국에서 수집한 영상자료들 2 안무화 작업 중인 안은미컴퍼니 무용수들

‘아저씨를 위한 무책임한 땐쓰’는 가장으로서, 직장 상사로서 무거운 책임을 지고 살아가는 아저씨들의 사회적인 몸을 ‘춤’이라는 추상언어로 기록하려는 시도다. 4000개의 막걸리 병을 배경 삼은 ‘아저씨 땐쓰’는 힘이 넘치고 흥겨우며 우스꽝스럽기도 하지만 그 현란한 움직임 속에는 고단한 삶의 애환이 덩달아 꿈틀거린다. 안은미는 이 무대를 “우는 법을 배우지 못한 아저씨들을 위한 해방의 장”이라 말한다. 제목처럼 모든 책임을 내려놓고 잠시나마 노동과 계급을 벗어던지라는 의미다. 연습실에서 만난 무용수들은 생활 현장의 아저씨들이 보여준 과격한 움직임을 춤으로 구현하느라 시종일관 뒹굴고 부딪치며 안무화 작업에 여념이 없었다.

3 39사심없는 땐쓰39(2012) 4 39조상님께 바치는 땐쓰39(2011)

- 수년간 춤과 가장 거리가 먼 사람들의 ‘땐쓰’에 주목하고 있다.
“인류 시작부터 춤이란 곧 노동 해방이었다. 손님이 왔을 때나 국가행사, 누가 죽었을 때 등 일상적 상황이 아닌 어떤 중요한 모멘텀에 춤을 췄다. 사는 게 너무 힘들고 인간의 한계점에 부닥칠 때도 춤을 췄다. 다른 차원의 삶으로 가고자 하는 열망인 거다. 그런데 시대가 바뀌면서 춤이 전문화되고 추는 춤에서 보는 춤으로 변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이 자기보다 멋진 대상을 바라보는 데 익숙해져 자기가 얼마나 멋있는지에 대한 기준이 남이 됐다. 이제 다시 원래대로 가자는 거다. 춤추면 다 멋있거든. 생활에 찌든 아버지, 할머니 얼굴이 춤만 추면 전혀 달라진다. 인간이 가진 생명성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런 숨겨진 것을 드러내려는 작업이다.”
-관객들은 무용공연에 전문성을 기대하지 않나.
“이 작업은 오히려 아마추어 느낌이 없다. 보통 아마추어에게 뭘 가르쳐서 하려면 성과중심이 된다. 방송에서 청춘 합창단 같은 것도 성과를 논하지만 우린 성과가 없다. 가르치지 않기 때문이다. 있는 그대로 아름답다고 믿는 거다. 춤으로 다른 인간이 된 순간 자체가 아름다움이고, 그건 다른 가치와 바꿀 수 없다. 가치 환산의 세계에 살고 있으니 타인보다 우수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는데, 바로 그런 걸 없애자는 거다. 춤을 추면 동등해지는 걸 느낀다. 돈 많은 사람도 춤출 땐 별 수 없다. 가장 쉽게 계급을 벗어날 수 있는 게 춤이다. 그렇다고 내 작업이 쉽다는 게 아니다. 아저씨들이 와일드하니 춤도 엄청 와일드해진다. 무용수들이 연습하다 부상당하고 난리도 아니다. 눈물 없이 볼 수 없을 정도로 처절한 작업이다.”
-객석까지 하나가 된다는데 민망해하는 관객은 없나.
“노래는 음치가 있지만 춤은 몸치가 없다. 박치도 생각 나름이다. 일부러 엇박을 출 수도 있고 흔들면 다 된다. 그래서 춤이 좋은 거다. 옛날에 누가 춤을 배워서 췄나. 노래도 사실 할머니들 노래 들으면 다 좋다. 원래 우리에겐 음치가 없었다. 서양음악 기준에서 음치가 생긴 거지, 옛날엔 그냥 자기 맘대로 랩이었다. 요즘엔 랩도 박자가 있고 틀리면 안 된다. 언제부터인가 틀리면 안 되는 세상이 된 거다. 이 작업은 틀려도 되는 세상, 틀림이 없는 세상이라는 자유로운 해방감을 줄 수 있는 프로젝트다. 그래서 감동적이다. 잘하고 못하고의 각도가 아니라 다른 기준을 주기에 누구나 즐길 수 있다.”
무브먼트 리서치 프로젝트란 길을 가다 우연히 만난 사람들이 ‘춤’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보이는 반응을 살펴 전반적인 특징을 잡아내 안무화하는 것. 할머니들은 나이 들고 수줍어 몸에서 나오는 활동성이 제한되므로 동작이 대부분 소극적이고, 10대들은 무조건 아이돌 댄스를 춘다. 아저씨들은 과격하고 ‘쩌렁쩌렁한’ 동작을 구사하는 것이 특징이다.
“전문가가 추는 춤이 아니라 실제 요즘 사람들이 어떻게 추고 있고 어떤 걸 선호하는가, 몸은 무엇을 기억하는가를 들여다보고 싶었다. 할머니들은 손동작만 하고 다리는 단순한데 아저씨들은 동작이 크고 다리도 움직인다. 마이클 잭슨 세대인 우린 나이트에 좀 가본 세대거든. 문워크보다 더 멋있는 리듬을 스스로 만들어 추는 사람도 있다. ‘강남스타일’은 이제 그만 추시라 했다. 똑같은 걸 벗어날 때부터 재미있어지고 아름다운 장면이 나오더라.
6개월에 걸친 수집 과정에선 퇴짜도 숱하게 맞았다. 한순간을 담기 위해 30분을 춤추며 기다린 적도 있었다. 하지만 ‘뭔가를 찾아내기 위해 방황하는 하이에나처럼’ 여유로우면서도 은근한 긴장감은 늘 특별한 경험을 선사했다.
“한번은 남원 뒷골목 중국집 뒷문에서 주방장 아저씨가 야채배달부랑 얘기하며 쉬는 걸 보고 살살 꼬드겼다. 갑자기 주방에서 짜장면 한 그릇을 들고 오더니 짜장을 막 비비면서 흔들어대는데, 예상치 못한 30초짜리 단편영화가 찍혔다.
- 대부분 막춤일 텐데 현대무용과 어떤 접점이 있나.
“현대무용이란 이 시대의 춤이다. 우리가 공감할 수 있는 것을 논의하는 거다. 결코 어려워야 하는 게 아니다. 어렵기만 하다면 혼자 추는 춤이지 현대춤이 아니다. 나는 막춤을 우리 스스로 추는 춤이라 정의한다. ‘프리덤 댄스’라고 하면 그럴듯하지 않나. 누군가는 관찰하고 기록해야 되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춤이다. 왜 한국 사람들은 저렇게 추는가, 세대에 따라 전혀 다른 춤의 모습들을 데이터베이스화해 가자는 거다.”

인류의 춤 기록한 ‘보디 뮤지엄’ 만들고 싶어
안은미는 1990년대 뉴욕에서 활동하며 원시적 생명력과 파격, 예측불허성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2000년대 독일의 세계적 안무가 피나 바우슈와 인연을 맺으며 유럽 무대에서도 인정받았다. 특히 우리 고전을 현대무용으로 풀어내는 독특한 스타일이 세계의 이목을 끌었다. 2003년 ‘은미의 춘향’으로 시작된 고전 재해석 작업은 파격적 형식과 맞물려 안은미 브랜드로 정착됐다. 2006년 ‘신춘향’은 세계음악극축제에 초청돼 한 달간 유럽을 순회했다. 우리 무용단이 국외에서 장기 순회공연을 한 것은 처음이었다. 2011년 에든버러 페스티벌에 한국 최초로 공식 초청된 ‘심포카 바리’는 그의 고전 재해석 작업에 정점을 찍었다.
“고전 해석이라도 과거에 매이지 않은 게 주효했다. 꼭 댕기머리를 보여줘야 하나.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게 동양의 미다. 사랑을 할 때도 서양처럼 더듬고 그럴 필요 없이 이불 속에서 발가락 두 개만 보여주면 된다. 그런 함축적이고도 동시대적 감각에 유럽도 열광하더라.”
그러나 예측 불가능한 예술가 안은미가 고전 비틀기에만 머물 리 없었다. 무용가이자 사회 구성원으로서 던져야 할 새로운 화두로써 도달한 것이 ‘인류학적 기록으로서의 춤’이다. 각 공동체의 춤을 역사책처럼 기록해 보존해야 한다는 것. “아무도 기록하지 않은 이 현장을 나라도 기록해야 한다고 느꼈다. 예술가로서 끊임없이 공부해야 하는데 한동안 전통 소재 공부가 잘 됐으니 이제 됐고, 이 시점에서 인류의 춤을 기록하는 것이 내가 해야 할 공부다. 궁극엔 보디 뮤지엄을 만들고 싶다. 요즘엔 미디어로 다 해결되니 전 세계 춤추는 영상을 모아놓는 센터가 되겠지. 사람은 언젠간 죽으니 죽은 자들의 댄스 묘지가 될 수도 있겠다.
안은미는 무브먼트 리서치 외에도 할머니를 위한 나이트클럽, 청소년을 위한 클럽, ‘땐씽마마’ 프로젝트 등 일반인들이 참여하는 커뮤니티 댄스 프로젝트를 연중 쉼 없이 기획하고 있다. 달빛 아래 잘 노는 할머니들은 야외로, 내밀한 정서를 추구하는 청소년들은 닫힌 공간으로 데려가 잔치를 벌여주고 자신은 뒤로 빠져 잔치의 주체를 그들 자신으로 만드는 일련의 작업들이다.
-공동체에 춤을 되돌려주는 작업이 무용가 개인에게 어떤 의미가 있나.
“나도 배우는 게 많다. 다양한 삶이 있지만 우리가 만나는 사람은 정해져 있고 나이 들면서 점차 혼자가 되지 않나. 이 프로젝트를 통해 많은 친구를 얻었다. 지방 공연을 가면 할머니들이 떡을 들고 찾아온다. 배 안 아프고 고등학생 22명의 엄마가 됐다. 요즘도 고민 생기면 나를 찾아 온다. 공부만 알던 아이들이 나를 통해 다른 세상을 봤다는 것도 너무 고맙다.”
-아저씨 다음은 어떤 집단에 주목할 건가.
“미정이지만 이 사회 속에 살고 있는 이상 뭐라도 계속할 거다. 어릴 때는 칭찬받으려 기를 썼지만, 자꾸 잘한다 소리만 듣다 보니 의미가 없더라. 내 에너지를 누군가와 공유하는 방법을 찾게 되고, 이제는 바깥으로 나가기로 방향을 잡았다. 사람들이 누굴 구경하는 게 아니라 자기한테 포커스를 맞출 시간을 주자는 거다. 결과물을 얻기보다 사는 과정에 리듬을 주고 다이내믹하게 이끄는 문화운동을 이어가고 싶다.”
4월에도 역시 일반인들과 피나 바우슈 오마주 공연을 올린다. 지난해 개봉한 3D영화 ‘피나’를 본 관객 50명을 모아 각자 2분짜리 무대를 구성해 100분 동안 릴레이로 펼칠 예정이다.
“영화를 보며 피나가 이끈 이 20세기의 정신을 어떻게 21세기로 가져갈까 고민하다 관객에게서 뭔가를 끌어내자는 생각에 이르렀다. 특정 집단을 대상으로 한 것도 아니니 더 다양한 얘기들이 나온다. 난 아이디어만 조금씩 도와주고, 이런 작업이 10년 이어지면 자가발전소가 돼 거기서 분명 아티스트가 나올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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