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情이 모이는 단지 가운데 널따란 마당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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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1호 22면

1 ‘같은 높이와 같은 간선도로, 같은 외관’의 균질한 도시계획으로 세계적인 명품도시 현재의 파리가 된 것이다. 이 대규모 재개발 사업의 대표적 상품이 7층짜리 중정형 공동주택이다.

프랑스 혁명, 특히 19세기 파리의 역사에 등장하는 바리케이드(barricade)는 경계이고 진영이다. 자유로워야 할 도시 속에서 경계가 만들어지는 순간 양 진영의 대치와 폭력은 불가피하다. 영화 ‘레 미제라블’ 속 1830년의 파리 시가지는 참으로 형편없다. 좁은 골목길에 더러운 하수구, 힘없는 서민들의 다닥다닥 붙어 있는 공동주택…. 이들이 바리케이드를 형성해준 사회적·물리적 공간구조였다면, 아이러니하게도 이들의 현실적인 등 돌림으로 앞장선 젊은이들이 먼저 희생된다.

1852년 제 2제정을 시작한 나폴레옹 3세는 오스만 남작을 통해 ‘파리 개조(Transformations de Paris)’를 단행한다. 열악한 도시구조와 주거환경의 개선이 일차적 목표라면, 부수적 결과로 바리케이드 없는 열린 도시가 되었다. ‘같은 높이와 같은 간선도로, 같은 외관’의 균질한 도시계획으로 세계적인 명품 도시로 꼽히는 현재의 파리가 된 것이다. 이 대규모 재개발 사업의 대표적 상품이 7층짜리 중정형 공동주택이다.

2 은평뉴타운 중정형 아파트. 가운데 뻥 뚫린 마당에서 서로 어울리고 나면 하루가 남부럽지 않다. 3 마쿠하리. 도쿄에서 나리타 공항 가는 길에 있는 지바현 신도시 ‘마쿠하리 베이타운’. 뚜렷한 중정형 아파트로 구획된 시가지가 보인다.

‘같은 높이, 같은 도로, 같은 외관’으로
2003년 서울시는 ‘강북을 강남처럼’이라는 기치 아래 균형발전본부를 출범시켜 뉴타운 사업을 시작했다. ‘IMF 사태’ 졸업과 2002년 월드컵의 열기로 ‘무엇이든 할 수 있는(can do it)’ 시절이다. 은평 뉴타운은 첫 번째 시범사업지구로서 서울시가 공영개발한 곳이다. MA(Master Architect)로 위촉되어 해외의 바람직한 도시개발 사례를 연구한 결과 은평의 도시조직에 적합한 주거 유형으로 유럽식 중정형 아파트를 제안했다.

은평 뉴타운은 땅의 힘이 좋은 곳이다. 서울의 주산인 북한산을 동쪽으로 직면하고 서쪽으로는 서오릉 자연공원이 받쳐주고 북으로는 서울시의 경계인 창릉천이 가로질러 한강으로 흘러가는 형국이다. 남쪽으로는 서울의 서북 관문인 박석고개와 갈현근린공원, 구파발목과 진관근린공원 등의 자연 산세와 폭포동, 물푸레골, 못자리골 등 이름만으로도 알 수 있는 개천과 습지들이 우수한 자연 생태계를 구성하고 있다.

펼쳐져 있는 우람한 자연 속에서는 건축물의 높이가 의미를 잃는다. 사람의 눈높이에서 하늘을 바라볼 수 있는 정도의 높이가 가장 안정적이다. 7층 내외의 23m 높이를 규범화한 파리 시내가 아름답게 느껴지는 까닭이다. 중정형 아파트는 땅을 소중하게 여기는 낮은 도시를 향한다.

은평 뉴타운의 길은 사람의 길이다. 차나 자전거가 사람이 감내할 수 있는 속도라면 같이 섞일 수 있다. 우리의 동네 길은 이처럼 사람 위주의 길이어야 한다. 차 속의 나도, 자전거 위의 너도, 길 가는 그이나 창가의 그녀도, 모두 한동네 이웃이다. 길 위에서 인사 나누고 눈 맞추고 서로 부르는 일은 일상이다. 중정형 아파트는 길을 사람에게 내주는 느린 도시 속에 있다.

은평 뉴타운의 이웃은 더불어 산다. 이웃 사람들은 어떤 조건으로도 구별될 수 없다. 팍팍한 세상살이에서 이웃이 사촌 되어 주는 게 더 살갑고 반가운 일이다. 가운데가 뻥 뚫린 마당 같은 아파트 단지에서 서로 어울리고 나면 그 하루가 남부럽지 않다. 중정형 아파트는 이웃과 더불어 사는 하루하루가 있는 도시다.

은평 뉴타운의 집들은 자기 얼굴이 있다. 한국형 아파트는 대부분 단지 내부를 향하기 때문에 길에서의 얼굴이 없다. 아름다운 도시를 떠올리면 도시의 얼굴(facade)을 마주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마주한 집들의 얼굴은 길 위의 나를 향한다. 길 위의 내가 로미오가 되면 창밖 발코니의 그녀는 줄리엣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중정형 아파트는 사람을 마주하는 얼굴 도시가 되어 준다.

이처럼 낮은 도시, 느린 도시, 이웃 도시, 얼굴 도시가 은평 뉴타운이 지향하는 설계 지침(Design Guide Line)이다. 중정형 아파트는 이러한 개념들을 생활가로를 중심으로 충실히 해결하고 있다. 뉴타운 사업은 이렇듯 열악한 도시 구조를 새로운 비전으로 바꿔주면서 살기 좋은 새집을 마련해 주는 일인 것이다.

이웃과 함께하는 느린 삶이 있는 곳
“두껍아, 두껍아. 헌 집 줄게 새집 다오.” 어렸을 적 모래 장난을 하며 즐겨 부르던 전래동요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네 염원 중 으뜸이 새집이었던 모양이다. 우리나라엔 아직도 헌 집이 많다. 전쟁 후 폐허 속에서 70~80년대까지 여러모로 부족했던 시절에 엉성하게 지어진 집들이 문제다.

LH공사의 자료에 따르면 서울시의 노후화 주택 수만도 20%에 이른다. 헌 집은 대부분 과거 덜 갖춰진 도시 구조 속에서 어쩔 수 없이 남겨져 있다. 헌법 제35조③항에는 ‘국가는 주택개발정책 등을 통해 모든 국민이 쾌적한 주거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라고 명시해 놓고 있다. 뉴타운이든 도시 재생이든 주거복지가 되는 ‘강북 개조’를 해서라도 국민의 염원은 해결되어야 한다.



최명철씨는 집과 도시를 연구하는 ‘단우 어반랩(Urban Lab)’을 운영 중이며,‘주거환경특론’을 가르치고 있다. 발산지구 MP, 은평 뉴타운 등 도시설계 작업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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