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믿음] 다름을 존중해야 하는 이유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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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0호 27면

기독교의 교리 가운데 ‘삼위일체’가 있다. 기독교가 믿는 하나님의 본질에 대한 교리다. 기독교는 유일신 하나님을 믿지만 그 하나님은 성부·성자·성령으로 존재하는, 삼위가 하나 되신 하나님이라는 교리다. 안타깝게도 이 교리는 종종 기독교 내부에서나 타 종교와 문제를 일으키는 소지가 되기도 한다. 세 신을 섬긴다는 오해를 받기도 하고, 같은 뿌리에서 나온 유대교나 이슬람교와 갈등을 겪기도 한다. “성부도 하나님이요, 성자도 하나님이요, 성령도 하나님이라면 당연히 세 분이 한 분이라고 말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이 교리는 기독교의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교리로 여겨졌고 아예 ‘신비’로 다뤄졌다. 하나님의 존재를 이해하는 것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영역이기에 신비라는 말이 당연할 것이고 이를 이해하려는 시도 자체가 불경에 가까울 것이다. 하지만 이 교리에 대한 이해의 추구와 시도는 오늘도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다. 이를 이해하는 것이 바른 신앙의 핵심일 뿐만 아니라 세상을 향한 사명의 터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AD 451년 열린 칼케돈 종교회의에서 결정된 예수에 대한 교리 또한 이에 대한 증거다. “온전한 하나님, 온전한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두 본성을 가지시되 두 본성 사이에는 혼돈도 변화도 없으며 나눔도 분리도 없다. 각 본성이 가진 고유함은 하나됨으로 상실되지 않으며 오히려 보존됨으로 한 인격을 형성하신다.” 성자 어거스틴 같은 신학자는 이렇게 설명한다. “사람에게 몸이 있고 정신이 있고 영혼이 있지만 그러나 한 사람입니다.”

물론 이 사실을 이해하는 건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이해하려고 애쓸수록 더욱 분명하게 다가오는 것은 평화를 향한 하나님의 소망이다. 삼위일체의 하나님은 세 위(位)로 존재하시며 세 위의 관계는 갈등도 다툼도 분리도 아닌 하나됨이요, 평화다. 기독교는 평화의 종교요, 상생의 종교요, 공동체의 종교라고 말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본성 때문이다.

삼위일체 교리는 다름을 무시하고 억압함으로 갈등과 대립을 만들어가는 세상 속에서 다름을 존중함으로 하나를 이루어 평화를 추구하라는 거룩한 사명의 음성이다. 그것이 세대 간의 갈등이든, 사상 간의 갈등이든, 심지어 종교 간의 갈등이든 간에 하나님의 궁극적 소망은 오직 평화이다.

안타까운 것은 삼위일체 교리를 ‘신비’로만 여기는 바람에 교리가 갖는 근본 뜻을 잃어버리는 일이다. 중세의 십자군 전쟁에서 나타난 모습이나 오늘날 교회끼리 갈등하는 모습은 하나님의 본성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다른 종교와의 관계에서도 우리와 다르다고 해서 배척하거나 공격하는 건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을 이해하고 섬김으로써 화평을 이루며 나아가서는 그들 또한 하나님의 은총을 입도록 하는 것이야말로 바른 기독교인의 자세다.

만물은 뜨거움과 차가움, 밝음과 어두움으로 이뤄진다. 이 둘은 함께 존재하면서 화목 가운데서 하나됨을 이룬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되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두 사람은 부모를 떠나 ‘한 몸’을 이룬다. 아인슈타인 이후 근대 물리학에서 주장하는 양자역학도 같은 흐름일 것이다. 올해는 먼저 기독교 안에서의 평화가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이 땅이 교회에 소망을 두게 되는 그날을 기대한다.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포기할 일도 아니다. 이를 포기함은 하나님을 포기함이요, 세상을 포기함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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