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저 호들갑은 이제 그만!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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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9호 30면

설날을 앞두고 국내 굴지의 대기업에 납품하는 A사의 B사장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김 기자, 요즘 정부와 언론이 왜 엔저를 갖고 이리 호들갑인가. 한국의 수출 의존도가 크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마치 엔저 때문에 수출 대기업이 곧 망할 듯하다는 소리 일색이네. 우리 같은 중소기업은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대기업 구매 담당자는 원화 강세에다 엔저까지 들먹이며 납품가격을 깎겠다고 통보할 텐데. 이런 사정을 언론이 알기나 하는 건지….”
귀를 울리는 따끔한 질책이었다. 그 다음부터 고민이 시작됐다. 도대체 환율이라는 게 한국 경제에 어떤 왜곡을 가져올까 하는 점이다.

김태진 칼럼

B사장의 엔저 걱정은 다음 달 시작되는 납품가 협상 때문이다. 중소기업 쪽에선 통상 ‘씨알(CR: 코스트 리덕션)’ 이라고 부른다. 이미 원화 강세를 이유로 가격 인하를 통보 받은 직후였다. B사장은 수출 신화를 만들던 1970년대 초반 부품업체를 창업해 연 매출 1000억원대 중소기업으로 키운 이다. 40년 동안 급격한 환율 변동뿐 아니라 엔저까지 여러 번 겪으면서 터득한 경험이 ‘결국은 납품가격 인하 통보’라는 것이다.

전국경제인연합회는 2007년 12월 이런 조사 자료를 내놓았다. ‘주요 기업의 임금-생산성 조사결과’ 보고서에서 2006년 현대자동차의 작업자(정규직) 1인당 평균 임금이 5698만원(주야 2시간 잔업과 철야·휴일특근 수당을 모두 더한 수치)으로 도요타의 5496만원보다 많다고 발표했다. 당시 일부 언론과 오피니언 리더들은 매년 반복되는 현대차 노조의 높은 임금인상 요구를 이 근거로 반박했다. 생산성은 도요타의 절반 수준이면서 임금은 더 많이 받는다는 것이다.

문제는 환율이다. 전경련이 계산한 엔화 환율은 740원대다. 도요타 평균 임금(735만 엔)에 이를 그대로 적용했다. 교묘(?)하게도 엔화 가치가 가장 낮을 때를 기준으로 삼았다. 이 논리를 엔화 환율이 1500원을 넘었던 지난해에 대입해 보자. 도요타 근로자의 연봉은 1억원(1억1000만원)을 훌쩍 넘어선다. 생산성이 떨어지는 현대차 노조를 두둔하자는 게 아니다. 거대 경제단체의 꼼수가 문제다. 환율로 경제를 왜곡한 셈이다.

최근 정부 고위 관계자도 이런 왜곡을 걱정하는 듯 “엔저에 따른 급격한 수출 감소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있으나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밝힌 바 있다. 우리 수출액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삼성전자, 현대·기아자동차 같은 글로벌 플레이어급 대기업은 해외 생산확대와 품질 경쟁력으로 엔저 파고를 넘길 수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들에게 납품하는 중소 협력업체다.

냉동고보다 더 춥다는 혹한이 찾아온 설 직전, 더 추운 소식도 들린다. 지난해 영업이익 10%를 돌파한 수출 대기업이 올해 원고·엔저 영향으로 목표를 7%까지 낮추면서 광고를 포함한 각종 비용을 30%씩 줄였다는 것이다. 이렇게 비용을 깎으면 부품업체와 거래 중소기업은 뭘 먹고 살라는 말인가. 물론 모든 기업은 이익을 많이 내고 이를 재투자해 더 많이 성장하려 몸부림친다.

지난해 삼성전자의 영업이익이 30조원에 육박하고, 현대·기아차도 12조원을 넘었다. 역대 최고치였다. 수출 대기업의 이런 실적은 혼자만 잘해서 낸 게 아니다. 정부의 보이지 않는 환율 지원(?)과 국민의 각별한 애국심, ‘수출을 많이 해야 경제가 성장한다’며 이들을 보호했던 언론도 한몫했다. 이런 사상 최대 실적을 올해 예산 집행의 기준으로 잡으면 또 다른 경제 왜곡 현상이 생긴다. 이제는 빚을 갚을 차례다.

예전 설날 시골에선 구들장 아랫목에 모여 화투나 윷놀이를 하곤 했다. 외풍이 심한 한옥이라 윗목까지 온기가 일부라도 전해지려면 꾸준히 불을 때줘야 했다. 그래선지 어른들은 생활이 어려울 때도 연료비를 아끼지 않았다. 불을 덜 때면 윗목에 앉은 사람은 감기에 걸리기 쉬워서다. 일종의 배려다. 대기업들에 이런 배려를 기대하는 건 언감생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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