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 살리기 유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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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12월 1일자 영화평론가 조희문 교수의 시론 '관객의 선택 강요 말라'를 읽고 몇마디 거든다. 미리 말해두지만 이 글은 반박문이 아니다. 趙교수의 시론은 전문가적인 식견이 철철 넘쳐서 나 같은 아마추어 영화 애호가는 입도 뻥끗 못하게 했다.

*** 선택을 압박했다면 잘못

그렇지 않아도 나는 진작부터 趙교수의 말처럼 관객의 선택을 강요하지 말라는 거센 핀잔을 듣게 될 줄 알고 있었다. 그런 찝찝한 예감은 나의 '고양이를 부탁해'에 대한 거론이 어느 순간 무슨 '살리기'로 표현되고 또 어느 순간 급기야는 '살리기 운동'으로 부풀려지면서 자리잡기 시작했다.

나의 주장, 즉 누가 뭐래도 우리의 '고양이를 부탁해'가 올해 최고다라는 극히 주관적인 견해는 그저 그쯤에서 머물렀어야 한다. 그것이 행여 투지에 불타는 '살리기 운동'으로 번지면서 그야말로 관객의 선택을 압박하는 의미로 비쳐졌다면 그런 끔찍한 잘못은 전적으로 내 몫이다.

그건 마치 내가 그린 '화투그림'이나 내가 부른 노래 '화개장터'가 최고 수준의 예술품인데 왜 안팔리느냐며 머리에 띠를 두르고 운동을 벌이는 꼴이기 때문이다.

변명을 하자는 게 아니다. 내가 우연히 '고양이…'영화를 봤을 때는 극장 상영이 불과 두주일을 못 넘기고 막을 내리기 하루 전이었다. 사람이 안 든다는 게 지리멸렬의 이유였다. 30년 가까이 되는 영화애호가 입장에서도 그런 경우는 흔했다. 이미 익숙해진 상태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번만은 달랐다.'고양이…'의 눈빛이 너무 맑았다.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서 얼결에 SOS를 친 거다.

그때까지도 영화의 제작사나 감독이나 주연배우가 누군지도 까맣게 모른 채 무작정 중앙일보 영화담당 기자를 찾아 어찌된 일인가 다그쳤다. 그쪽에서 웬 오버냐고 되물었으니까 다그쳤다는 표현이 옳다. 그 후 우리는 오랫동안 논쟁을 벌였다. 그리고 그는 나의 돌출행동을 눈여겨 지켜보겠다고 했다.

그는 나의 돈키호테적 발상이 가상했던지 며칠 후 문화면에 가수 조영남이가 여차여차해서 '고양이…'살리기 운동에 나섰다는 내용의 기사를 눈에 띌 정도로 써주었다. 여기서부터 나는 팔자에도 없는 운동가라는 선의적 오명을 쓰게 된다.

거기서 탄력을 받아 나는 스포츠조선의 고정 칼럼에 무려 4회 연속으로 '고양이…' 예찬을 조목조목 늘어놓았다. 어떤 점이 그토록 우수하냐고 자꾸 물어왔기 때문이다. 그런게 선택의 강요로 비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전유성의 경우도 그렇다. 그는 내가 굳이 좋다고 떠드는 영화를 한번 직접 봐야 시원하겠는데 그걸 상영하는 극장이 없다며 자기가 아예 심야에 영화관을 통째로 빌려서 볼 작정이니 기왕이면 못본 사람들이 함께 모여 관람을 하자고 제의를 해 놀랍게도 4백석이 꽉 찼던 건데 그게 趙교수의 말대로 모든 사람들에게 동의를 얻기 위한 불순한 강요운동으로 비쳐졌다면 전유성도 깊은 반성을 해야 한다. 그런 의미가 아닌가.

아닌 게 아니라 수상쩍은 일들이 꼬리를 물었다. 최근 공교롭게도 '고양이…'이외의 소위 수준이 높다는 영화들이 목소리를 높이며 한국영화의 최소 상영일수나 예술영화 전용관 혹은 극장을 통째로 빌리는 상영 방식 운운하는 모양인데 나는 그런 일에 관여한 적도 없고 그럴 입장도 못된다.

*** 명작은 명작으로 남는데

趙교수는 친절하게도 '세계 굴지의 영화제에서 수상을 해도 흥행에 성공하는 예는 극히 드물다'며 마치 '관객이 동의하지 않으면 즉시 별볼일없는 영화로 전락한다'는 투로 말했다. 설마 영화전문가가 관객이 외면해도 명작은 명작으로 남고 상영조차 못했어도 명작으로 살아남는 경우는 얼마든지 존재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으리라 믿어 본다.

그보다는 사실 영화평론가 趙씨 쪽에서 '고양이…'가 예쁘니 제발 좀 맡아달라 억지 부탁을 하고 가수 趙씨 쪽에서 '관객한테 강요 말라'고 잡아떼야 제격인데 입장이 정반대로 돌아가서 못내 웃음을 터뜨리게 한다.

(이 글은 본지 12월 1일자 조희문 교수의 시론 '관객의 선택 강요말라'에 대한 반론입니다.)

趙英男(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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