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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 태우는 데 한나절, 세우는 데는 천년도 부족"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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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8호 12면

1953년 총경으로 승진한 뒤 경찰 정복을 입은 차일혁 경무관.

지난달 25일 국방부는 고(故) 차일혁 경무관의 유족에게 화랑 무공훈장 2개를 전달했다. 1952년 차 경무관의 빨치산 토벌 전과를 61년 만에 다시 발견했기 때문이다. 국방부 관계자는 “당시 전시라 혼란스러웠기 때문에 훈장이 제대로 전달되지 못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차 경무관은 이번에 종군기장 1개도 추가로 받았다. ‘전쟁영웅에 군과 경찰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는 방침에 따라 국방부가 적극적으로 전적 확인 작업에 나선 것이다.

61년 만에 무공훈장 받은 故 차일혁 경무관

차 경무관은 이미 충무 무공훈장 1개, 화랑 무공훈장 3개, 대통령수장 1개, 종군기장 1개, 공비토벌기장 2개를 받은 역전의 용사다. 지리산 빨치산 토벌에서 무명(武名)을 떨쳐 ‘지리산의 호랑이’라고도 불린다. 전쟁기념관은 심사를 거쳐 그를 포함, 6ㆍ25전쟁 때 큰 공을 세운 경찰ㆍ철도경찰(현 철도공안) 등 37명을 호국영웅으로 추가할 계획이다.

그동안 경찰 내부에서도 그의 이름은 잘 알려지지 않은 편이었다. 그러던 경찰도 뒤늦게 차 경무관을 조명하고 있다. 2011년 6월 그를 총경에서 경무관으로 1계급 특별승진시켰다. 충남 아산 경찰교육원의 대강당은 그의 이름을 따 ‘차일혁 홀’로 불린다. 경찰 창설 과정에서 친일경찰을 청산하지 못했다는 논란을 잠재우려면 항일투사 출신인 그를 띄워야 하기 때문이다. 차 경무관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1951년 차일혁 경무관(오른쪽)이 전북지구 전투사령관 최석용 대령과 공중정찰을 앞두고 L-4 연락기 앞에 서있다. 그는 당시 18 전투경찰 대대장(경감)을 맡았다. [차일혁기념사업회] 아래 1952년 차일혁 경무관이 사찰ㆍ암자 소각 명령을 어기면서 구해낸 화엄사를 1년 만에 다시 찾았다.

악질 日警 사이가와 쓰보이 암살설
그는 1920년 전북 김제에서 태어났다. 민족성향 교사를 연행하던 일제 특별고등계 형사를 폭행해 다니던 홍성공업전수학교를 그만둬야 했다. 36년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지강(芝江) 김성수 선생과 만났다. 지강 선생은 항일 비밀결사인 ‘의열단’ 단원이었다. 차 경무관의 평생 멘토였다.

차 경무관은 지강 선생의 소개로 중국중앙군관학교를 졸업한 뒤 중국군 포병장교로 복무했다. 41년 조선의용대에 들어가 항일유격전 활동을 펼쳤다. 광복 후 대부분 조선의용대 동지들이 중국이나 북한을 선택했지만 그는 남한에 남았다. 차 경무관의 아들 차길진(66)씨는 “아버지가 공산주의에 환멸을 느꼈다”고 말했다.

당시 미 군정 당국은 새로 만든 한국 경찰이 자리를 잡기까지 일본인 경찰들을 계속 기용했다. 좌익 시인인 임화를 고문해 악명이 높은 일본 경찰 사이가 시치로(齊賀七郞)는 부정하게 번 재산을 빼돌리면서 한국인들을 괴롭혔다. 그러던 그가 45년 11월 2일 자택 앞에서 권총에 맞아 죽었다. 당시 신문에선 ‘누군가가 사이가를 처단했다’고 보도했다. ‘장군의 아들’ 김두한이 사이가를 저격했다는 말이 흘러 나왔다.

하지만 최근 학계 연구에 따르면 차 경무관은 지강 선생, 이규창 등과 함께 사이가 저격에 가담했다. 방아쇠를 당긴 사람이 차 경무관으로 전해진다. 광복 후 아나키스트 운동을 했던 이문창씨도 “‘차 동지가 사이가를 쐈다’는 말을 선배들에게 들었다”고 덧붙였다. 그는 또 다른 일본 경찰 쓰보이 이와마쓰(坪井巖松)도 암살한 것으로 알려진다.

차 경무관은 6ㆍ25전쟁이 난 뒤 인민군 치하에서 장정들을 모아 ‘구국유격대’를 조직해 싸웠다. 수복 후 경찰에 투신해 지리산 빨치산 토벌대장(경감)을 맡게 됐다. 51년 1월 결사대 105명을 이끌고 당시 남한의 유일 수력발전소인 전북 정읍 칠보발전소를 점령했던 빨치산 2000여 명과 싸워 승리를 거뒀다. 차 경무관의 보신병(경호원)이었던 김규수 참전경찰유공자회장은 “차 대장(차 경무관)은 조선의용대 시절 나중에 북한군 포병 사령관이 된 무정에게서 포격술을 배워 박격포를 잘 쐈다. 수십m 앞 담배개비를 총탄으로 부러뜨릴 만큼 소총도 명사수였다”고 전했다.

그는 빨치산 토벌 과정에서 단순 부역자는 풀어줬다. 끝까지 전향을 하지 않은 빨치산은 전쟁포로로 대했다. 부대원들에게 일체의 보복살인을 금지시켰다. 김 회장은 “대장은 ‘적 포로에 관대한 부대는 실전에 강하다’고 늘 강조했다”고 말했다. 차 경무관은 친필일기인 『진중기록』에 “공산주의를 위해 죽었다, 민주주의를 위해 죽었다 할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있겠는가”라고 썼다.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 실제 모델
53년 7월 휴전이 됐지만 빨치산의 기세는 꺾이지 않았다. 당시 남한 각지의 빨치산은 ‘남부군’으로 통합됐다. 남로당 출신 이현상이 남부군 사령관을 맡았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현상을 잡지 않고 지리산 빨치산을 토벌했다고 할 수 없다”고 했다. 차 경무관은 그해 9월 17일 그를 찾아내 사살했다. 그러곤 친척이나 친구들도 인수를 거부한 이현상의 시신을 거둬 화장한 뒤 골분을 섬진강에 뿌렸다. 이현상 사살의 공적을 놓고 다퉜던 군이 강력하게 항의했다. 경찰 내부에서도 못마땅한 분위기가 높았다. 그렇지만 “죽은 뒤에도 빨갱이고 좌익인가”라며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고 한다.

51년 5월 빨치산의 근거지가 될 만한 사찰ㆍ암자를 불태우라는 명령이 상부로부터 내려왔다. 차 경무관은 전남 구례의 화엄사 대웅전 문짝을 떼어낸 뒤 소각했다. 그러고는 “문짝만 태워도 빨치산 은신처를 없앨 수 있다”고 보고했다. 그는 “절을 태우는 데 한나절이면 족하지만 절을 세우는 데는 천 년 이상의 세월로도 부족하다”고 말했다. 정부는 고찰을 구한 공로를 나중에 인정해 2008년 10월 그에게 보관문화훈장을 수여했다.

차 경무관은 53년 영화 ‘애정산맥’의 실제 주인공이 된다. 이 영화에선 죽마고우였던 전투경찰과 빨치산이 같은 마을 출신 여성을 두고 삼각관계에 놓였다. 남자 주인공은 그를 모델로 했다고 한다. 후에 인기 TV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에 모티브를 제공했다는 후문이다.

차 경무관은 58년 금강에서 수영을 하다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38세의 젊은 나이였다.
차길진씨는 “아버지를 비롯한 전쟁영웅들은 살아서 애국했듯이 죽어서도 애국하는 마음을 우리들에게 가르쳐 줬다. 그들의 영혼은 지금도 우리 곁에 머물고 있다”고 말했다.



고(故) 차일혁 경무관은
1920년 전북 김제 출생
36년 중국 상하이로 망명
37년 중국중앙군관학교 입학
41년 조선의용대 입대
45년 귀국 후 일본 경찰 사이가 저격
50년 경찰 지리산 빨치산 토벌대장 임명
51년 칠보발전소 탈환. 화엄사를 소각 위기에서 구해
53년 남부군 사령관 이현상 사살. 총경 승진
54년 충주경찰서장
56년 진해경찰서장. 충남경찰국 경비과장
57년 공주경찰서장
58년 수영 중 심장마비로 사망
2011년 경무관으로 특별승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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