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속으로] 뮤지컬 여제, 옥주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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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주현은 뮤지컬 ‘황태자 루돌프’에 함께 출연한 안재욱에 대해 “나의 연기 멘토”라며 “그에게서 상대방이 더 돋보이게끔 리액션하는 법을 배웠다”고 했다. 인터뷰 도중 그는 같이 연기한 배우에 대해 좋은 말을 많이 했다. 수수한 차림, 편안한 표정, 느긋한 말투 등 여러모로 여유로웠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그의 끝은 과연 어디인가.

 옥주현(33). 이젠 가수보다 뮤지컬 배우라는 수식어가 더 어울린다. 지난해 뮤지컬 ‘엘리자벳’에서 천장을 뚫을 듯한 고음을 토해내고 굴곡진 여인의 일대기를 절절하게 풀어내 더뮤지컬어워즈와 한국뮤지컬대상 여우주연상을 잇따라 거머쥐며 명실상부한 ‘뮤지컬 여제’로 등극할 때만 해도 그게 옥주현의 정점이라 여겼다. 마치 김연아의 올림픽 제패처럼 말이다.

 아니었다. 올해 시작과 함께 뮤지컬 ‘레베카’가 공연계를 강타하고 있는 데는 옥주현의 공이 절대적이었다. 싸늘하게 등장해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무대를 압도할 때의 긴장감이란! 그가 부르는 타이틀곡 ‘레베카’는 얼마나 소름 끼치던지. 게다가 그의 배역 ‘댄버스 부인’은 주연이 아닌 조연이다. 어떤가, 이 정도면 그의 속내가 슬쩍 궁금하지 않은가. 가장 잘나가는 순간 왜 갑자기 2인자 자리를 택했는지, 어떻게 해서 이토록 연기와 노래가 늘었는지, 안티팬은 여전히 많은지 등등. 지난달 30일 제작사 사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뮤지컬 ‘레베카’에서 열연 중인 옥주현.

 - 뮤지컬 데뷔 8년 만에 첫 조연입니다.

 “그런가요. 전 주연이라 생각했는데…. 농담이고요. 물론 저도 처음 제안이 왔을 땐 조금 당황했어요. 왜 내가 조연을 해야 되지? 그것도 황후(엘리자벳)에서 갑자기 집사(댄버스 부인)로 가는 건 너무 급전직하 아닌가 싶기도 했고. 근데 음악 들어보고, 배역 연구해보고, 대본 보면서 조금씩 생각이 바뀌더라고요. 분량은 많지 않지만 배우가 되기 위해선 한 번쯤 도전해볼 만한, 모험을 걸 만한 배역이 아닌가 싶은.”

 - 그래도 악역인데, 예쁜 여주인공도 아닌데 괜찮던가요.

 “예쁜 거 많이 했잖아요.(웃음) 맛이 다른 거죠. 묵은지와 겉절이가 다르듯 말이에요. 나이 든 역할이란 부담감이 조금 있었지만 그것도 그냥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려고 해요. 억지로 될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연륜이란 게, 깊이라는 게.”

 - 이번에 연기 좋다는 얘기 많이 듣죠?

 “뮤지컬 8년 했으니 이젠 잘할 때도 됐잖아요. 공연 끝나고 집에 가면 ‘아, 이렇게 할 걸’ ‘이게 더 맞지 않나’ 자꾸 돌아봐요. 되새김이 심해요. 공연할 땐 수면 유도제를 먹 지 않으면 잠이 안 와요. 저 원래 친구들하고 노는 거 무척 좋아했는데 언제부터 공연 일정에만 맞춰 움직이게 되더라고요, 사람도 안 만나고. 너무 몰입하는 게 아닌가 싶어 나 스스로가 무서울 정도예요. 요즘은 오히려 조금 벗어나는 게 좋을 거 같아 도예를 하고 있어요. 여하튼 그렇게 고민하고 집중하고 그러니 조금씩 나아지겠죠. 그래도 많이 부족해요.”

 - 댄버스 부인은 어떤 인물인가요.

 “사실 뮤지컬 ‘황태자 루돌프’에 출연하느라 제가 ‘레베카’ 연습 초반부터 합류를 못했어요. 사람들과 친해질 기회도 못 얻고. 근데 결과적으론 그게 좋았던 거 같아요. ‘댄버스 부인’은 조금 차가워야 하는데, 백스테이지에서 주변 사람들과 너무 살가우면 무대에 나와 연기하기가 조금 버거울 수도 있거든요. 의상팀이 그래요, 말 걸기가 좀 무섭다고. 무엇보다 독일에서 만난 작곡가 실버스터 르베이에게서 들은 조언을 가슴에 못질하듯 늘 새겼어요. 댄버스 부인한테서 레베카가 보여야 한다고. 심지어 내용 모르고 온 관객은 저를 보고 ‘저 사람이 혹시 레베카?’라고 헷갈릴 정도가 돼야 한다고(실제 뮤지컬에서 ‘레베카’는 아예 등장하지 않는다). 하녀·집사의 이미지가 아니라 레베카의 자태와 아우라가 댄버스 부인을 통해 연상돼야 한다고 강조했죠.”

 - 공연 개막날 르베이가 왔죠. 뭐라던가요.

 “슬퍼도 섣불리 무너지지 않고 꼿꼿한 자세를 유지한 게 좋다고 하셨어요. 댄버스 부인의 존엄성을 잘 지켰다고.”

 - ‘레베카’ 노래는 어땠나요.

 “G까지 올라가요. 제가 지금껏 부른 뮤지컬 곡 중 가장 힘겨워요. ‘엘리자벳’에서 부른 ‘나는 나만의 것’도 마지막이 높긴 한데, 그건 두성과 가성을 활용하면 되거든요. 근데 ‘레베카’는 진성이에요. 진성으로 불러야 그 맛이 나요. 절규니깐.”

 - 잘 올라가나요.

 “노래도 분석이에요. 악보를 보고 스케줄에 맞춰 꼼꼼히 따져가며 불러야 해요. 전 대사를 빨리 외우질 못하는데, 제 판단엔 못 외우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가사 빨리 외우고 악보·대본 빨리 놓으면 자칫 너무 한 방향으로 고정돼 버리거나 객관성을 잃게 될 수 있거든요. 처음 한 게 익숙해지고 그게 편하다 보니 긴장감을 놓아버리는. 전 그게 위험하다고 생각해요. 캐릭터는 숨 쉬는 거잖아요. 때론 내가 놓친 스타일이 더 맞을 수도 있고, 다른 디테일이 더 어울릴 수도 있고. 대사 못 외운 채로, 어딘가 비워둔 채로, 이것저것 탐색해 가면서 조금씩 인물을 구체화시키는 게 더디 가더라도 맞는 게 아닐까 싶어요. 그렇게 하다 보면 노래까지 자연스레 몸에 착 붙게 되는 순간이 오더라고요.”

 - 과거 핑클·SES 멤버들과 비교하면 현재 자신이 가장 잘나가잖아요. 솔직히 뿌듯하죠?

 “다들 각자 위치에서 잘 살고 있잖아요. 제가 못한 결혼을 하고 애도 낳고. 다른 삶을 사는 거죠. 성공? 그런 적용은 맞지 않는 거 같아요. 굳이 따지면 그래도 효리 언니가 가장 성공한 거죠. 국민가수에, 지금도 예능 프로그램 출연하고, 소셜테이너로 발언권도 있고.”

 - 언제부터 내 연기에 물이 올랐다는 생각이 들던가요.

 “음, 그건 솔직히 지금도 없고요. 대신 ‘엘리자벳’ 할 때부터 공포심이 사라진 건 분명해요. 무대 서는 데 자신감이 생겼다고 해야 할까. 제가 2005년 ‘아이다’로 뮤지컬 데뷔를 했는데, 그때 관람 후기를 보니 장난이 아닌 거예요. ‘대사 버벅댄다’ ‘시선 처리 엉망이다’ 등. 핑클 할 때는 ‘재수없다’ ‘쟤 별로야’ 등 막연하고 그냥 무작정 공격이 많았는데 이 바닥에선 조목조목 따져 들어오는 거죠. 그때부터 댓글 보는 게 두려워졌어요. 조금만 실수해도 ‘또 욕먹는 거 아냐’라는 의기소침, 걱정, 두려움 등등. 그랬는데 지난해부터 그런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워진 거죠.”

 최근 SNS에선 “나 옥주현 정말 싫어하는데 ‘레베카’에선 잘함. 어쩔 수 없이 인정!”이라는 글이 속속 올라오고 있다. 최근 잇따른 호연 덕분에 “안티를 팬으로 돌려버렸다”는 이야기도 적지 않다. 그래도 옥주현 하면 여전히 ‘안티의 아이콘’ 아니던가. 본인 스스로는 “안티 덕분에 이만큼 성장했다”고 했다.

 - 어릴 때부터 독했나요. 그러니 여기까지 왔겠죠?

 “욕심은 많았던 거 같아요. 핑클 할 때도 보컬 레슨 받으려고 혼자 미국 가고 그랬어요. 매니저 오빠들이 ‘노래 잘하는데 왜 그래, 너 오버야’라며 말렸는데도 고집부렸어요. 가서 재즈 보컬 레슨 받고, 소울 노래 배우고 그랬는데, 그런 것들이 하나둘 쌓여 지금 답을 해주는 게 아닌가 싶어요. 핑클 할 때는 자격지심도 많았죠. 뚱뚱하고 못생기고. 그래서 더 보호막을 쳤던 거 같고.”

 - 성형수술하고 다이어트하니 극복되던가요.

 “그것만은 아닌데 , 그 덕을 보긴 했죠. 그냥 겪을 거 겪고 아플 거 아파야 되는 거 같아요.”

 - 요즘엔 안티팬들이 뭐라고 하던가요.

 “별말 없던데요? 그만큼 제가 핫 하지 않다는 증거 아닐까요.(웃음) 악플보다 무플이 더 아프다는 말도 맞는 거 같고. 2년 전 ‘나는 가수다’ 때가 최고 아니었나 싶어요. 그때 ‘이소라와 싸웠다’는 소문 때문에 엄청 시달렸고, 라디오 생방송 진행을 하고 있는데 게시판에 이상한 글이 계속 올라와 눈뜨고 보기 괴롭고, 무섭고(그는 이에 대해 SBS ‘힐링 캠프’에 나와 억울함을 호소하며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지금은 언제 그랬는가 싶기도 해요.”

 - 당시 극단적인 생각도 잠시 했었다면서요.

 “글쎄, 제가 머리가 나빠서 그런지 가물가물한데요. 솔직히 ‘나가수’ 때는 순간적으로 감정이 북받쳐서, 억울해서 그랬겠지만. 제 인생 중 최악은 오히려 2006년 ‘아이다’ 할 때였어요. 그때 제가 요가센터 운영하다 망했거든요. 수십억원 날렸죠. 돈이 없어진 것도 서럽지만 사업이란 게 그렇더라고요. 친척·지인 등 가장 가까운 인간관계마저 무너지는 게 더 상처예요. 시청 앞에 홀딱 벗겨진 기분? 수금하러 다니고, 직접 돈 빌리고…. 40~50대 가장이 느껴야 할 절망을 그때 다 느꼈어요. 극단적인 생각도 잠시 들었던 거 같아요. 너무 구석으로 몰리니깐. 그래서 제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인생 뭐 있나’는 식의 무심한 면도 생긴 거 같아요. 안티의 악평? 뭐 그런가 보다, 넘기게 되는 거죠.”

 - 괜히 신경 안 쓰는 척하는 거 아니에요.

 “그게요, 자꾸 욕만 먹다 보면 오히려 ‘나 옥주현 좋아’라고 하면 더 불안해요.(웃음) ‘왜 이러지’ ‘이건 뭐야’ 싶기도 하고. 이러다 조금 못하면 더 공격하는 거 아냐 싶기도 하고. 우선 댓글 잘 안 봐요. 그런 거 보고 휘둘리면 내 페이스 잃으니깐. 긍정적 요소를 찾으려고 해요. 뭐라고 비난하면 ‘그거 고치면 되지’라고 생각하고, 또 그러면서 발전하고.”

 - 그래도 인신공격엔 억울할 듯싶은데.

 “그건 당연히, 누구나 억울하죠. 하지만 어떡하겠어요. 어느 순간 ‘안티가 내 팔자인가’ 싶기도 하고. 안티 내성도 생겨요. 들을 만한 내용이면 뽑아먹어 내 성장의 자양분으로 활용하고, 인신공격성이나 막무가내면 그냥 무시하고. 분리시킬 줄 아는 거죠. 그리고 저도 요즘 새삼 느끼는 건데 제가 생각보다 약하지 않더라고요. 뚝심도 있고, 맷집도 강해지고. 그런 안티들에게 ‘그래, 어디 한번 보여줄게’라는 식의 오기도 생겨 지금의 옥주현을 만든 밑바탕이 됐으니 돌이켜 보면 정말 고마운 존재가 아닌가 싶어요. 괜히 하는 말이 아니에요. 진심으로 그분들께 감사하게 생각해요.”

 - 의연해진 건가요?

 “연예인 데뷔한 지 벌써 15년인데요, 돌이켜 보니 어른스러운 면이 조금 있었네요. 장녀에다 여섯 살 아래 남동생이 있고. 초등학교 6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고1 때 재혼하시고. 사주에도 그런 게 있대요. 남편 같은 딸, 아빠 같은 누나. 어릴 때부터 집에 큰일이 있다 보니 자연스레 대범해졌죠. 엄마한테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대범한 척했던 거 같기도 하고요.”

 오후 2시 시작된 인터뷰는 사진 촬영까지 이어지며 4시쯤 마무리됐다. 그는 이날 ‘레베카’ 출연이 있었다. “공연 당일엔 인터뷰 안 하는데, 너무 얘길 많이 해서 소리 안 나올까 걱정”이라며 발을 굴렀다. 인터뷰가 끝나자마자 자리에서 바로 분장을 했다. 본인이 했다. ‘왜 직접 하느냐’고 물으니 “꽤 오래된 습관이에요. 직접 천천히 하면서 서서히 그 인물로 빙의가 되는 거죠”라고 했다. ‘레베카’ 책도 갖고 있었다. 줄을 여러 군데 쳐놓는 등 꽤 열심히 읽은 티가 났다.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는데 문득 세상 고초를 다 겪은, 누이 같은 잔상이 전해왔다. 그는 지금 ‘인기 아이돌’에서 ‘고독한 아티스트’로 향하는 계단 앞에 서 있었다.

글=최민우 기자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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