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눈덩이 자본유출 바라만 볼 건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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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지난해 개인들이 해외에서 쓴 돈이 206억7000만 달러로 사상 처음 200억 달러를 넘어선 것으로 나타났다. 2003년에 비해 12.5%가 늘어난 수치다. 지난해 평균환율인 달러당 1140원을 적용하면 대략 23조6000억원 정도가 개인들에 의해 해외로 빠져나간 셈이다. 이 통계에는 불법적인 방법으로 해외로 돈을 빼돌린 사례는 포함되지 않았다.

단순히 외화유출 규모가 크다는 것만을 탓할 일은 아니다. 경제규모가 커지고, 국제화가 진전됨에 따라 개인들이 해외에서 쓰는 돈도 늘어나게 마련이다. 과거 만성적인 외화 부족에 시달리던 시절과 달리 넘쳐나는 외환보유액을 감당하기가 부담스러운 마당에 외화유출 자체가 문제될 것은 없다고 본다.

여기서 주목되는 대목은 지난해 극도의 내수 부진에도 불구하고 개인들의 해외 지출과 송금이 경제성장률의 세 배 가까운 비율로 늘어났다는 사실이다. 지난해 개인 자본 유출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해외여행 경비가 95억 달러로 거의 절반을 차지했고, 해외송금(68억7000만 달러)과 유학연수비(24억9000만 달러)가 그 뒤를 이었다. 관광이나 교육 등 대부분 국내에서도 할 수 있는 일을 해외로 나가서 해결한 것이다. 해외에서 돈을 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래도 소득과 재산이 많은 계층이다. 한마디로 돈 있는 사람들이 국내에서 돈을 쓰지 않은 대신 해외로 나가서는 돈을 썼다는 얘기다. 이들이 해외에 나가 쓴 돈의 절반만이라도 국내에서 소비했다면 지난해 소비 부진이 그토록 심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돈 가진 사람들이 해외로 나가는 것을 윽박지르거나, 애국심에 호소한다고 해서 국내소비가 살아나지는 않는다. 문제는 이들이 해외로 나가지 않고 국내에서 마음껏 돈을 쓸 수 있는 여건과 분위기가 조성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외국인 투자 유치에 앞서 국내의 돈 가진 사람들을 붙잡을 수 있을 만큼 관광.의료.교육서비스의 경쟁력을 높이고, 이들이 눈치보지 않고 국내에서 돈을 쓸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드는 일이 시급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