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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강화의 「각시 바위」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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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언제 들어도 우리 민족의 체취처럼 구수하고 흐뭇한 이야기. 예부터 구전돼 내려온 설화는 한 개의 바위 조그마한 언덕에도 서려있다. 마을과 마을, 고을과 고을에 숱하게 많은 이런 이야기들이 오늘이라고 외면 당할 수는 없다. 아직 널리 알려지지 않은 내 고장 내 마을의 이런 이야기들을 서로 나누어보자. [편집자주]
강화군 화도면 사기리 앞 바다의 속칭 「각시바위」이야기는 이곳 섬사람들에겐 퍽 구슬픈 전설이 되어 지금도 면면히 전해온다.
지금으로부터 5백여년전 이조태조 5년 중국명나라에 사는 함허란 사람이 처자를 남겨두고 홀연히 집을 떠나 우리나라 관악산에 와서 중이 되었다. 그는 각지를 순례하다 강화도 사기리 정수사를 찾았다.
여기서 자리를 잡은 곳이 길이 2백「미터」나 되는 큰 개울바위, 이른바 동천에서 도를 닦기 30여년이 흘렀다.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다 지친 부인은 그 동안 남편이 우리 나라에 왔다는 수소문을 하고 방방곡곡을 헤매다 하루는 정수사의 소위 「함허 동천」에 이르러 그리던 남편을 만나게 됐다.
참선하고 있는 남편에 와락 달려들어 매달렸다. 그러나 남편은 반기기는커녕 돌부처처럼 말이 없다. 정신없이 남편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순간 남편이 겨우 하는 말이 『나는 속세와 인연을 끊은 불도이니 나를 남편으로 생각지 말고 고향에 돌아가라』는 것.
그녀는 안타까움과 애절한 몸부림, 아버지를 기다리는 자식들의 이야기로 며칠을 두고 남편과 아버지의 정을 호소했지만 끝내 허사였다.
할 수없이 그녀는 배를 타고 귀향 길에 올랐다. 사기리 앞바다에 이르렀을 때 점점 멀어지는 남편이 있는 정수산 중턱, 함허 동천을 또다시 눈물로 바라봤다.
그러나 남편은 아내의 심정은 아랑곳없이 바위 위에 끓어 앉아 염불만 외고 있었다. 그녀의 애타는 가슴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마침내 그녀는 배를 뒤엎고 죽고 말았다.
그후 배가 가라앉은 바다 위에는 배 모양의 조그만 바위 하나가 생겼다.
섬사람들은 이 바위를 「각시바위」라 일컬어 왔다.
함허 대사는 그후 정수사를 증축했으며 지금도 그가 도를 닦았다는 집이 있으니, 그것을 함허당이라 부른다.

<사기리 411 이헌재(78)씨의 말> [강화=인천 김영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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