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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전몰장병 수기에서|아내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혹독한 추위가 계속된다. 눈이 내린 다음날은 유난히 더 그랬다. 오인덕 소위는 고지에 서있다. 눈가루가 휘몰아친다. 사금파리처럼 얼굴을 찌른다. 그 추위 속에서 주먹밥이 배달된다. 그것은 돌덩어리였다. 그처럼 얼어붙었던 것이다. 돌을 깨물듯 와작와작 밥을 먹는다. 그 속에서 문득 떠오르는 아내의 얼굴, 얼굴….
『경희엄마, 나는 이 덩어리를 삼켜도 탈이 없소. 오히려 피는 더 뜨거워지오. 가슴이 덥기 때문이오. 당신이 나의 품에 있기 때문이오. 밥을 먹을 때마다 뜨거운 숭늉생각, 그리고 당신 생각….』
오 소위는 너무나 다정한 남편이었다. 1951년 2월 14일부터 시작된 그의 수기는 절절마다 「경희엄마」 였다.
『…내 앞도 위험하고, 내 뒤도 위험하고, 내 아래도 위험하고, 내 위도 위험하오. 그러나 경희엄마, 당신이 있는 가슴만은 참 편안하오.』
태양을 품듯, 그는 아내를 품고 전장에 서있었다. 죽음에 대한 공포도, 고통과 인간에의 회의 같은 것까지도 녹여주는 능력을 그 아내는 신비한 태양처럼 베풀고 있었다.
그러나 전쟁의 한 모퉁이에선 터무니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흥, 결혼하였다구? 나는 패배자이고 그는 승리자이다. 만일 6·25가 없었고, 나의 가족과 집이 없어지지 않았던들, 나는 패배의 쓴잔을 마시지 않았을 것이다. 좌우간 나는 그대에게 축배를 보낸다. 숙자 잃은 날. 1951년 3월 1일』
그의 부모는 학살을 당했었고, 그의 집은 불타 없어졌다. 그리고 사랑하는 이마저 떠나버렸다. 그리고 그도 죽고 말았다.
「평화」라는 표제를 달아놓은 수첩 하나를 열어본다.
『전쟁을 해도 그리운 것은 역시 그립다. 순이!』 해병 제3301부대 제10중대 제3소대 고광국 병사의 수기는 시냇물처럼 맑디맑은 얘기들이다.
『조국에 대한, 당신에 대한 나의 맑은 양심은 나를 굳세게 해줍니다.』
사랑의 향기와 그 높이와 심연을 증언하는 한 줄의 「순애보」-.
어느 유품들속에선 편지 한장이 나왔다. 「제3030부대·정영기」라는 필적이 한구석에 보인다.
『…오빠, 놀라지 마세요. 집에 언니를 데려왔어요. 누군지 아시면 기뻐하실지, 슬퍼하실지…. 수박집의 순희 있지 않아요. 편지를 쓰래도 웃기만 해요.』
말하자면 부재결혼이었다. 어머니는 후손보기가 조금했던 가보다. 「정영기」씨는 그의 「새색시」에 관한 기록을 남기지 못했다. 휴가가 없었을 것이다. 그날을 맞기 전에 그는 전선의 어느 곳에서 세상을 떠났을 것이다.
머리빗과 만년필과 잇솔과 지폐 한줌을 남긴 한 병사는 늘 꿈을 꾼다. 손바닥만한 수기는 그 얘기들이다. 하루는 딸을 가진 아버지, 또 어느 날 밤엔 아들을 가진 아버지가 되는 꿈이었다. 아마 아기를 가진 아내를 놓아두고 출정했었나 보다. 이 「꿈속의 아버지」는 두개의 이름을 지어놓았다. 「정선」이와 「영욱」이 「아버지」는 꿈을 꾸었던 전장의 지명을 따서 그 이름들을 지었다. 영월과 정선과. 영욱의, 어쩌면 정선의 그 아버지는 어느 산기슭에서 죽음을 당했을 것이다. 누구의 이름을 부르며 숨졌을까. 얼마나 외로왔을까. 아무도 모른다. 수기는 그 훨씬 전에 끝나 있었다. 정작 자기의 이름은 어디에도 적혀 있지 않았다. <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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