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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 인문교류사를 발굴하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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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최형규
베이징 총국장

베이징(北京)에서 골동품과 고서적 거리로 유명한 류리창(琉璃廠) 부근 골목에 기윤(紀<6600>·1724~1805)의 고택이 있다. 크지는 않지만 청대 사대부 집안의 풍모를 느낄 수 있어 좋다. 기윤은 건륭제(乾隆帝) 때 사고전서(四庫全書) 편찬을 주도한 청대 최고 학자 중 한 명이다.

 특이한 건 그가 생전에 가장 존경하는 문인으로 조선 후기 실학자 박제가(朴齊家)와 유득공(柳得恭)을 꼽았다는 사실이다. 조선 정조 때인 1790년 둘은 선진 서적을 구입하기 위한 검서관(檢書官) 신분으로 베이징에 갔는데 기윤이 그들을 집으로 초청해 상석에 앉히고 존경을 표했을 정도였다. 당시 기윤은 지금의 중국 외교부장에 해당하는 예부상서였다. 당시로선 상상하기 어려운 파격적 예우를 받은 이유는 유득공의 난양록에서 찾을 수 있다. 기윤이 말하길 “유득공의 영제집(?齋集)을 모두 읽어 봤는데 시문의 품격이 수려하며 박제가의 차수집(次修集)과 같이 맛을 보니 성령(性靈)이 보이더라…”고 했다.

 국가와 민족 그리고 신분을 건너뛴 인문교류 백미라 할만하다. 한데 고택에 이 같은 설명이 없어 아쉽다. 있다면 한국인은 분명 중국을 훨씬 가깝게 느낄 텐데 말이다. 역으로 중국인도 마찬가지 아닐까.

 베이징은 한·중 인문교류사의 보고다. 조금만 사료에 관심을 가지면 구궁(古宮·자금성)과 천안문(天安門) 부근에서 조상들의 발자취를 찾기는 어렵지 않다. 왕푸징(王府井) 거리에는 명대 조선 외교사절이 머물던 옥하관(玉河館) 옛터가 있고 류리창 입구에는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이 서점 규모에 압도돼 흥분했던 문수당(文粹堂) 터도 있다. 물론 치욕의 역사도 있다. 두 번이나 고려 국왕에 올라 개혁을 추진하다 실패하고 베이징에서 숨을 거둔 충선왕, 그리고 아들 충선왕을 폐위시켜 달라고 원 세조에게 달려가 간청한 충렬왕의 용렬함도 구궁 어딘가에 숨어 있다. 화려함의 극치였다는 위안밍위안(圓明園)을 보고 감탄보다 오히려 한탄했던 선조들의 예지도 보인다. 조선 영조 때 실학자인 홍대용(洪大容)은 이곳을 방문하고 그 감회를 연경방문기(燕記)에 남겼다. “강희는 60년 제위에 있으면서 검소했는데 옹정은 사치가 지나쳐 원밍위안 원래 규모의 10배를 초과해 버렸다. 누각들의 사치스러움을 보건대 내부는 얼마나 화려할지…”라며 군주의 도를 일깨웠다.

 이번 주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 특사단이 베이징을 방문해 중국과 확실하게 합의한 게 하나 있는데 양측 인문교류 확대라고 한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한·중 인문교류사 발굴을 해보면 어떨까. 자긍은 자긍대로, 치욕은 치욕대로 서로의 역사를 공유하며 공감해 보자는 얘기다. 인문교류가 별건가. 서로 교감하고 이해하는 거고 그래야 신뢰가 쌓이는 것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