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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 미주 이민 100주년] 6. 소수 인종과의 갈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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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LA의 한인들은 1992년 이곳을 휩쓴 흑인 폭동을 '사이구(saigu)'로 부른다.

당시 한인 가게들에 떼지어 들이닥쳐 수 십년에 걸친 땀과 노력을 한순간에 무너뜨렸던 그날의 악몽이 여전히 생생한 탓에 아예 폭동 발생일인 '4월 29일'이 사태를 지칭하는 단어로 굳어진 것이다.

11년이 지난 지금도 소수 인종과의 갈등은 여전히 교민 사회를 위협하는 불안 요인으로 잠복해 있다.

LA 코리아타운 근처의 허름한 아파트에 살고 있는 멕시코인 토머스 라라(32). 그는 영어는 몰라도 한국어는 안다. 불행히도 그가 아는 한국말은 주로 '바보' '지랄' 같은 욕설이다.

1996년 아내와 함께 멕시코 국경을 넘어 밀입국한 그는 2000년 3월부터 지난해 7월까지 LA의 한 한인 대형 상점에서 점원으로 일했다.

"어느날 갑자기 매니저(반장)가 신참 한인에게 업무를 가르쳐 주라고 했어요. 그런데 넉달 후 이 한인이 부반장으로 승진해 나에게 일을 시키더라고요."

라라가 2년5개월간 평직원으로 머무르는 동안 그가 지도했던 신참 한인 15명은 부반장으로 승진했다. '고속 승진'한 한인들이 주급 6백~7백달러를 받을 때 라라는 절반인 3백달러에 만족해야 했다.

그는 "한인은 입사 후 1년이 지나면 유급휴가로 7일을 줬지만 나같은 히스패닉은 이틀만 받았다"고 주장한다. 차별이라고 항의하면 욕설만 날아왔다고 그는 말한다. 지난해 7월 이 상점은 라라와 그의 히스패닉 동료 50여명을 불법 체류자라는 이유로 해고했다.

하지만 라라와 동료 해고자들은 해직 이후 지난해 12월까지 이 상점 앞에서 인종차별 업체라며 불매 시위를 계속했고 공정고용위원회에 한인 업주를 제소했다.

라라의 시위는 교민사회에 누적돼 온 히스패닉과의 갈등이 표면화한 사례다. '히스패닉(Hispanic)'은 스페인 말을 쓰는 미국 내 중남미계 주민을 뜻한다.

LA에서 소수 인종을 상대로 고용 상담을 하고 있는 남가주 한인 노동상담소에 지난해 히스패닉 종업원들이 한인 업주들을 상대로 낸 인종차별 사례는 2백50여건이나 된다. 물론 한인업주들도 할 말은 있다.

이들은 "백인 기업에서 영어를 못하면 승진이나 높은 임금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한인 상대로 장사를 하는데 한국어를 쓰는 직원이 더 대우받는 것은 불가피하다"고 주장한다.

한인과 히스패닉과의 갈등은 서로 부대끼며 살 수 밖에 없는 구조에서 시작됐다.

주로 식당.가게 등 소규모 자영업에 종사하는 한인들은 백인들이 기피하는 대도시의 히스패닉 주거지로 들어가 사는 경우가 많다. 자연히 인종 갈등이 빚어질 소지가 크다는 것이다. 미국에서 한인 업체들이 가장 많이 밀집해 있는 뉴욕과 LA의 경우 히스패닉 주민의 비율은 각각 27%, 46.5%나 된다.

캘리포니아 리버사이드 주립대의 장태한 교수는 "미국 내 최저 소득층에 속하는 히스패닉들은 미국 사회에 적응하지 못해 누적된 불만을 언제든지 한인을 상대로 표출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저학력.저임금의 히스패닉 노동자들에게 의지해야 하는 한인 업체들의 영세한 규모도 히스패닉과의 갈등을 유발하는 원인 중 하나다.

산체스(가명)는 2001년 7월부터 한인 세탁소에서 매일 9시간씩 일하며 한달에 1천2백달러를 받았다. 그는 그러나 지난해 11월 세탁소를 그만둔 뒤 "임금을 체불했다"며 캘리포니아 노동청에 업주를 제소했다.

그의 주장대로라면 '4시간 연속해 근무할 때 의무적으로 주는 휴식시간 10분을 일한 임금' '5시간 연속 근무 때 30분 이상 줘야 할 식사시간 근무 임금' '휴일 근무에 따른 초과근무 수당' 등의 까다로운 노동법 규정에 맞춰 업주는 2만3천달러의 임금을 추가로 지급해야 한다. 하지만 세탁기 20여대가 고작인 이 업소에서 그렇게 월급을 줬다가는 운영이 안된다.

히스패닉과의 갈등에는 일부 교민들의 인종적인 편견도 작용한다. 백인 문화만 인정하고 소수 인종은 무시하는 발언이나 태도는 히스패닉들의 한인관(觀)을 악화시킨다.

지난해 LA의 한 초등학교 교장은 한인 학부모의 인종 비하성 발언 때문에 곤욕을 치렀다. 어머니가 가정부로 일하는 히스패닉 학생이 반 친구들을 생일파티에 초청했다는 얘기를 들은 한인 학부모가 "그 집에 가봐야 먹을 게 뭐가 있겠냐"고 생각없이 말한 게 화근이었다.

우연히 아들로부터 이 얘기를 전해들은 가정부는 자신이 일하던 집주인에게 하소연했고, 유명 방송 앵커이던 집주인은 교장에게 전화를 걸어 "히스패닉 사회단체와 연계해 교내 인종차별을 공식적으로 문제삼겠다"고 했다.

워싱턴에서 '평화나눔 공동체'를 운영하며 한인과 흑인간의 인종갈등 해소에 힘을 쏟는 최성진 목사는 "우리 교민사회에선 불안한 하부 구조는 무시한 채 주류 사회에 편입한 몇몇 성공사례만을 부각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지금이라도 교민 사회가 다른 소수 인종과의 분쟁을 줄이기 위한 적극적인 대화에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LA=신중돈.변선구.채병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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