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자료 아까워 며느리 정신병원 가두고…막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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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MBC 주말드라마 ‘백년의 유산’에서 무지막지한 악질 시어머니로 나오는 박원숙. [사진 MBC]

첫 회 방송 시작 4분 만에 시어머니(박원숙)는 며느리(유진)의 머리채를 쥐어뜯는다. 재벌회장 시어머니는 가난한 며느리가 죽이도록 밉다. 결혼식 날에도 내 아들의 여자 취미는 3년을 못 넘긴다며 협박한다. 3년이 다돼가자 며느리 앞에 여자 사진 3장을 내놓고, 남편의 취향대로 다음 여자를 골라보라고 한다.

 마마보이 남편은 그 와중에 바람을 피운다. 여자가 이혼을 결심하자, 위자료가 아까운 시어머니는 며느리를 정신병원에 가둔다. 며느리는 교통사고를 당하고, 기억을 상실한다. 여기까지가 1, 2회 줄거리다.

 이때 한 남자(이정진)가 여자를 도와주는데, 시어머니는 이들을 불륜으로 몰아간다. 기억상실을 빌미로 기억을 조작하려 든다. 그런데 이 남자. 박원숙의 딸이 짝사랑해온, 또 다른 재벌 2세다. 이른바 ‘막장의 대향연’이다.

 MBC 주말극 ‘백년의 유산’ 얘기다. 시청률은 상승세다. 방송 2주 만에 경쟁프로인 문근영·박시후 커플의 SBS ‘청담동 앨리스’를 가뿐히 제쳤다.

 아침드라마의 막장 바람이 주말 밤까지 접수한 걸까. 주말 밤 10시대가 제 2의 막장시간대로 자리잡은 모양새다. MBC ‘메이퀸’, SBS ‘다섯 손가락’에 이어, ‘백년의 유산’이 정점을 찍었다.

 밑도 끝도 없는 악역(박원숙), 정신병원 감금-교통사고-기억상실로 이어지는 자극적 전개, 한마디로 황당무계한 구성이다. 여기에 유진의 친정식구들은 코믹 가족극을 펼쳐 보인다. 극단의 억지와 평범한 홈코믹물이 공존하는, 새로운 방식의 막장이다.

 더 흥미로운 것은 시청자들의 태도다. 각종 드라마 게시판에서는 막장 코드를 비판하는 글보다 코믹하게 바라보는 반응이 많다. 한 시청자는 “말도 안 되는 악역에 말도 안 되는 설정이지만, 은근 ‘병맛(맥락 없고 형편없고 어이없음을 뜻하는 인터넷 조어)’의 중독성이 강하다”고 말했다.

 문화평론가 김수아(서울대 기초교육원 강의교수)씨는 “막장드라마 팬들은 말도 안 되는 설정에서 어떻게 이야기를 풀어가는가에 오히려 재미를 느낀다”며 “아침드라마 주요 소비층이 중장년 주부라면, 주말 막장 드라마에는 젊은층이 가세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 “이 시대의 시청자들에게 드라마의 현실성이 더 이상 중요한 가치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도저히 말이 안 되는 막장의 세계가 여러 갈등이 들끓는 일상의 무게감을 지워주기 때문일까. 팍팍한 현실을 부정하고 싶은 대중의 심리가 막장을 ‘씹으면서도 계속 보게 하는’ 힘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씻어지지 않는 불쾌함은 무엇일까. 드라마의 사회적 책임을 꺼내 든다면 너무 ‘꼰대’ 같은 태도일까. 상상을 초월하는 우리 드라마의 또 다른 얼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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