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철호의 시시각각

운동권이 기득권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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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이철호
논설위원

개인적으로 대선 때 가장 눈에 띈 것은 5곳의 이변(異變)이다. 모두 이명박 정부 5년간 ‘큰 싸움’이 벌어진 곳들이다. 우선,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의 서해5도가 속한 인천시 옹진군. 박근혜 후보는 72%를 득표해 영남을 제외하고 가장 많은 몰표를 받았다. 대선 때 NLL 논란까지 터졌으니 당연한 결과다. 그 다음이 희망버스의 고향인 한진중공업의 부산시 영도와, 쌍용차 옥쇄 파업이 있었던 경기도 평택시다. 모두 박 후보가 무난히 승리했다. 네 번째가 비극적인 철거민 참사가 빚어진 서울 용산구. 여기서도 박 후보는 52.33%를 얻어 서울 강북에서 유일하게 이겼다.

 마지막이 바로 제주도 서귀포다. 김황식 국무총리도 가장 마음을 졸인 곳으로 알려졌다. 서귀포에는 구럼비와 촛불시위로 상징되는 강정 해군기지가 있다. 김 총리가 갈등을 풀기 위해 혼신의 힘을 쏟은 곳이다. 서귀포는 연거푸 네 번의 총선에서 새누리당이 패배한 야당의 아성. 4·11 총선에도 민주통합당이 압승했다. 하지만 정작 대선에선 박 후보가 5%포인트 앞서는 이변을 낳았다. 제주시에서 미세하게 뒤지다가 서귀포에서 판세를 뒤집는 바람에 제주도 전체의 승리를 낚았다. 해군 기지 주변 유권자들이 문재인 후보의 ‘공사 즉각 중단’보다 박 후보의 ‘민군(民軍)복합형 관광항구’에 손을 들어준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에서 한 지역의 이슈가 전국화되면 정치적 프리즘을 통해 굴절되기 시작했다. 맨 먼저 야당 정치인들이 현지에 달려가 판을 벌인다. 여기에 자극받은 희망버스와 원정시위대가 쓰나미처럼 뒤쫓아 내려간다. 이들 외지인은 ‘반대를 위한 반대’를 외치다 흥분이 가라앉으면 ‘떴다방’처럼 발길을 돌린다. 그러곤 그만이다. 하지만 지역 주민들은 다르다. 가장 가까이서 오랫동안 진행과정을 지켜본 만큼 누구보다 사태의 진실을 잘 안다. 그런 다섯 곳의 핵심지역 유권자들이 민주당을 외면한 것이다.

 민주당은 대선 패배 이후 재활 몸부림에 한창이다. 현충원의 삼배를 시작으로 전국을 돌며 ‘회초리 순례’에 나섰다. 하지만 유권자에게 회초리로 맞기 전에, 민주당은 스스로를 돌아보는 게 우선이다. 왜 복지와 경제민주화를 선점해 놓고도 선거 막판마다 ‘민주 대 반민주’나 ‘박정희 대 노무현’의 헛발질을 하는 것일까. 혹시 친노와 486의원들의 뿌리 깊은 운동권 의식이 작동한 게 아닐까. 그들의 습관적인 질주 본능이 우리 사회를 편 가르고, 상대 진영을 증오와 타도의 표적으로 선동하는 느낌이다. 자신들은 운동권 시절 얻은 훈장이 마치 도덕적 우위를 보장해주는 것처럼 여기면서….

 어느덧 운동권 486은 2~4선의 중견 정치인이 됐다. 시장·도지사까지 나왔다. 하지만 같은 시대를 살아온 40~50대 유권자들의 심리적 부채의식은 빠르게 희석되고 있다. 오래 전 5·18 광주 술판사건은 옛 이야기라 치자. 요즘도 누구누구는 골프에 빠져 대중과 멀어진 지 오래라는 소문이 난무한다. 누구는 총선에서 떨어지자 휑하니 40일간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길로 날아갔다고 한다. 이들을 예전처럼 순수한 단일집단으로 간주하는 것도 착각이다. 이미 친노니, 김근태계니, 손학규계니, 정세균계니, 여러 계파로 나뉘어 줄을 선 지 오래다. 이제 ‘생계형 정치인’이라 해도 어색하지 않고, 언제 운동권이 기득권이 됐는지 헷갈릴 정도다. 486 운동권 출신들의 자업자득이다.

 이대로 가면 민주당은 작은 싸움에선 몰라도 큰 싸움에서 승리를 장담하기 어렵다. 이미 다섯 곳의 주요 전투가 대선에서 뒤집어졌다. 유권자들이 나이 들수록 보수화되는 ‘연령효과’도 무시할 수 없다. 문희상 비상대책위원장은 “60년 정통 야당이라는 역사만 빼고 모든 것을 바꾸겠다”고 했다. 과연 말처럼 쉬울지, 가만히 지켜볼 일이다. 새누리당은 그나마 친박계와 이명박계가 서로 난도질하면서 총선 때마다 물갈이 목표를 맞췄지만, 민주당은 계파 간 나눠먹기로 물타기에 그쳤지 않은가. 이제 민주당 스스로 회초리를 내리칠 때가 아닌가 싶다. 신(神)은 항상 최고의 선물은 고통의 보자기에 싸 보낸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