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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노에 내각, 군부 죄기는커녕 때론 확전 앞장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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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6호 26면

1937년 일본군이 북경 부근 장신점(長辛店) 근처 철로에서 중국군과 교전하고 있다. [사진가 권태균]

1937년 1월 21일 제70회 일본 제국의회에서 할복문답(割腹問答)이 벌어졌다. 입헌정우회의 하마다 구니마쓰(濱田國松) 의원이 ‘근년… 국민들의 언론 자유에 압박을 가하고 있고… 군(軍)의 저변에 독재 강화라는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도도하게 흐르면서 문무(文武)가 서로 삼가고 조심하는 선을 파괴할 우려가 있다’면서 점차 노골화되는 군부의 정치 간여에 문제를 제기한 것이 발단이었다. 만 예순아홉 나이에 의원 경력 30년의 하마다는 36년 1월까지 중의원 의장을 역임한 정계 원로였다.

[이덕일의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폐허와 희망 ③ 노구교 사건

노구교 전투상황.

그러나 이미 일본 군부는 어느 누구의 문제 제기도 참지 못했다. 2·26사건 이후 부활한 육·해군대신 현역 무관제에 따라 현역 대장 신분으로 육군대신이 된 데라우치 히사이치(寺內壽一)는 ‘군을 모멸하는 것 같은 느낌을 갖는다’고 반박했다. 하마다는 “내 말의 어디가 군을 모욕했는지 사실을 들어 달라”고 요구했고 데라우치가 다시 “모욕당하는 것처럼 들렸다”고 답변했다.

중일전쟁 당시 일본 총리 고노에 후미마로. 때론 군부보다 더 강경하게 확전론을 펼쳤다.

하마다는 다시 등단해서 “속기록을 검토해서 내가 군을 모욕한 말이 있다면 할복으로 사과하겠다. 그렇지 않다면 그대가 할복하라”고 되받아쳤다. 의회는 아수라장으로 변했고 다음날 데라우치는 히로다 고키(廣田弘毅) 총리에게 ‘정당들의 시국 인식이 부족해서 생긴 사건’이라며 정당의 반성을 요구하는 의미에서 의회를 해산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히로다는 물론 대형 전함의 건조 예산 등이 필요했던 해군대신 나가노오사미(永野修身)도 반대했지만 데라우치가 단독으로 사퇴하면서 내각은 붕괴했다. 히로다가 군부에 끌려다니면서 부활시킨 육·해군대신 현역제에 따라 육군에서 대신을 내지 않으니 내각이 무너졌던 것이다.

1937년 총선 뒤 국정방향 못 틀어 禍 자초
1937년 2월 히로다의 뒤를 이은 후임 총리는 전 조선주둔군사령관 하야시 센주로(林銑十郞)였다. 하야시는 1931년 만주사변 때 참모본부의 지시도 없이 조선주둔군 제39혼성여단을 불법적으로 만주 경내로 입경시켜 ‘월경장군(越境將軍)’이라 불렸던 인물이었다. 상부 명령 없이 타국의 영토를 불법 침공한 하야시가 처벌 받기는커녕 7년 후에는 총리직까지 오른 것이다.

이시하라 간지(石原莞爾)의 만주사변 도발 이후 일본군 내에 상부 명령 없이 전쟁을 일으키는 것을 출세의 지름길로 생각하는 분위기가 만연했다. 월경장군 하야시는 입헌정우회(立憲政友會)와 입헌민정당(立憲民政黨) 등이 법안 지연전술을 펼친다면서 중의원을 해산하고 총선거를 실시했다.
그러나 그해 4월 30일 실시된 제20회 중의원 총선거 결과는 하야시의 예상과는 정반대였다. 총 466석의 의석 중 입헌민정당은 179석, 입헌정우회는 175석으로 전체의 70%가 넘는 대승을 거둔 반면 하야시가 밀었던 소화회(昭和會)는 18석, 국민동맹은 11석에 그쳐 제3당이 된 사회대중당의 36석에도 미치지 못했다.
월경장군 내각은 4개월 만에 붕괴하고 1937년 6월 원로 사이온지 긴모치(西園寺公望)의 추천을 받은 고노에 후미마로(近衛文磨) 내각이 들어섰다. 고노에가 국민적 열기와 인기를 바탕으로 국정의 키를 제대로 잡아나갔으면 이후 일본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5섭가(攝家:섭정이나 관백에 임명될 수 있는 집안) 출신으로 귀족원 의장을 역임한 고노에에게 이런 요구 자체가 애당초 무리였다. 고노에는 이후 두 번 더 총리를 역임하지만 1940년에 국민총동원을 목적으로 대정익찬회(大政翼贊會)를 출범시켰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군부에 끌려갔을 뿐’이라고 변명했지만 총리 재임시 때로는 군부보다 강경하게 군사적 해결을 주장하기도 했다.

고노에가 총리가 된 지 불과 한 달 만인 1937년 7월 7일 밤 노구교(蘆溝橋)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육군 일등병과 순사가 부딪쳤던 고스톱 사건처럼 사소한 일이었다. 그날 밤 북경 서남쪽 노구교 부근에서 일본의 천진 주둔군 1여단 1연대 3대대는 이치키 기요나오(一木清直) 소좌의 지휘로 야간 훈련을 하고 있었다. 이치키는 5년 뒤인 1942년 8월 남태평양 과달카날 전투에서 전사한다. 에드윈 폴락 중령이 이끄는 미 1해병연대 2대대에 의해 부대원 전원이 전멸당하고 만다.
하지만 이때만 해도 기세등등했던 게 일본 육군이었다. 노구교 사건은 일본과 중국 양측 모두 상대방이 먼저 도발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일본 측은 한밤중에 몇 발의 탄환이 날아온 뒤 3대대 8중대원 135명 중 한 병사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서 문제가 발생했다고 주장한다. 중대장 시미즈 세쓰로(淸水節郞) 대위는 병사를 찾으라고 지시했는데 이 병사는 용변을 보러 간 것이어서 곧 복귀했다. 일본 측은 다시 중국군 쪽에서 여러 발의 탄환이 날아왔다고 주장했다.

이치키 대대장으로부터 보고를 받은 연대장 무타구치 렌야(牟田口廉也)는 “두 번이나 발사했으면 명백한 적대행위니 단호하게 전투를 개시하라”며 일본군의 장기인 상부 명령 없는 단독 공격을 지시했다. 중국군 제29군장 송철원(宋哲元)은 일본의 후원으로 화북(華北)을 지배하던 인물이자 사쿠라이(櫻井德太郎)가 제29군 고문이어서 중국군의 의도적 도발 가능성은 없었다. 그래선지 일본은 중국공산당이나 학생들의 소행이라고 바꾸어 주장했다.

그러나 패전 후 일본 육군의 음모 공작을 폭로했던 다나카 류키치(田中隆吉:소장) 중좌는 전후 심판 받는 역사(裁かれる歴史―敗戦秘話, 1948)에서 노구교 사건 다음날 중국군과 일본군 양쪽 모두에 총알이 날아들었다는 정보를 듣고, 공작에 능했던 시게카와 히데카즈 소좌에게 “그렇게 만든 원흉이 너지?”라고 묻자 고개를 끄덕였다고 밝혔다. 이 수기에서도 알 수 있듯이 중국 쪽에서 실제 발포했었다고 하더라도 노구교 사건은 일본군의 공작 결과였다. 사건 보고를 들은 고노에 총리가 “설마 또 육군의 계획적인 행동은 아니겠지?”라고 말했다는

일화도 이를 뒷받침해준다. 만주를 고스란히 내주고도 현상 유지에 바빴던 중국군이 먼저 도발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중국군이 사격했다고 해도 전사자는커녕 부상자도 없는 상황에서 진격 명령부터 내린 것은 이시하라 간지의 무용담을 훈장처럼 동경하던 일본군 전쟁기계들의 계획된 도발이란 증거였다. 연대장 무타구치는 중위 시절에 그 어렵다는 육군대학교에 입학했을 정도로 촉망 받았지만 2·26사건 후의 인사쇄신 차원에서 천진으로 좌천된 인물이었다. 그런 만큼 상황을 역전시킬 한 건이 필요한 처지였다. 다음날 무타구치 연대장으로부터 보고를 받은 여단장 가와베 마사카즈(河邊正三) 소장 역시 상하개념 없던 일본군 장군답게 자신의 지시도 없이 내려진 진격명령을 수긍했다.

그러나 화북(華北)의 지배권을 빼앗길까 두려웠던 제29군장 송철원은 7월 11일 ‘노구교의 인도, 대표자 사과, 책임자 처벌, 항일단체 단속’ 등 일본군의 모든 요구를 받아들이는 현지협정을 맺어 사태를 종결지으려 했다. 이렇게 ‘노구교 사건’이 국지전으로 끝나려던 바로 그날, 고노에 후미마로 내각은 이를 ‘북지(北支:북중국)사변’으로 부르면서 본토에서 2개 사단을 급파하는 화북(華北) 파병안을 승인하며 확전에 나섰고 북경과 천진을 점령했다.
고노에는 내부의 시선을 밖으로 돌리는 확전이 ‘국내대결 상태’를 해소하는 좋은 방책이라고 여겼다. 확전이 일본이 갖고 있는 모든 사태의 해결책이라고 막연하게 믿었던 언론들도 현지협정 체결 기사는 구석에 조그맣게 게재하면서도 전쟁 선동 기사는 1면부터 여러 면에 걸쳐 대서특필했다.

언론도 ‘中대륙 곧 점령’ 환상에 부화뇌동
만주를 손쉽게 점령했던 과거 경험에 마취된 일본의 정계·군부와 언론계는 일본군이 전면전을 전개하면 전 중국을 곧 점령할 수 있다는 환상에 빠져 있었다. 그래서 겉으로는 국제여론을 의식해 전선 불확대 방침을 표명했으면서도 속으로는 전선 확대를 추진했다. 스기야마 하지메(衫山元) 육군대신이 8월 17일의 각의에서 ‘전선 불확대 방침을 이전처럼 고수한다’고 발표한 뒤 마쓰이 이와네(松井石根:패전 후 남경학살 전범으로 처형) 상해파견군 사령관을 도쿄역까지 환송하면서 “남경까지 진격하라”고 역설한 것이 이를 말해준다.

특이한 점은 만주사변의 장본인 이시하라 간지가 참모본부 작전부장이란 요직에 있으면서 전선 불확대를 주장했다는 점이다. 이시하라가 물론 전쟁 자체에 반대한 것은 아니었다. 화북으로 전선을 확대하기보다는 만주국을 튼튼하게 세워서 소련과 미국을 물리치고 전 세계를 지배해야 한다는 세계 최종전쟁론에 따라 반대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1936년 이시하라가 내몽골 분리공작을 추진하는 관동군들에 중앙의 통제를 따르라고 설득하자 관동군 참모 무토 아키라(武藤章)가 “이시하라 각하께서 만주사변 당시에 했던 행동을 모방하고 있습니다”라고 반박했다. 그 순간 동석했던 젊은 참모들이 웃었다는 일화가 전해지는 것처럼 전쟁기계들은 이미 이시하라의 통제도 벗어났다.

이시하라는 9월 전선 확대파에 밀려서 참모본부 작전부장에서 관동군 참모부장으로 좌천되었다. 이시하라는 자신의 부하들이 자신의 흉내를 내면서 확전에 나서는 것을 씁쓸하게 지켜보면서 참모본부를 떠났지만, 확전을 주장했던 무토 아키라는 패전 후 전범으로 교수형에 처해진 반면 이시하라는 전범에서 제외되는 전화위복의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