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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포럼] 정권 오후 3시

중앙일보

입력

고은(高銀) 시인은 언젠가 "오후 세시는 무슨 일을 하기에도 이르고 무슨 일을 하기에도 늦다"고 썼다.

하루 하루가 허무하던 시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또 하루가 이렇게 가는구나 하는 흐릿한 의식이 글을 접하는 순간 나른한 서정(敍情)으로 바뀌어간 기억이 난다.

*** 1년짜리 장관 누가 맡나

그러나 이제 하루 하루가 핑핑 돌아가는 시절, 이런 글귀를 정권 말기의 어느 시점에 대어보면 그런 서정은 한가하다.

위기의 핵심에 경제를 둔 채 정치권만 쳐다보며 내년 대통령선거 때까지 기다릴 수 없는 지금, 누가 정권을 잡든 정치 일정에 관계없이 지금이라도 시작해야 할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 면에서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의 민주당 총재직 사퇴는 그 자체보다 그 후속 조치가 무엇이냐에 따라 의미와 평가가 달라질 것이다.

벌써 연말께 개각이 있으리란 관측과 함께 중립내각이니 거국내각이니 하는 말이 나온다. 여야를 가리지 않고 사람을 쓰는 거국내각이 돼야만 한다는 당위론도 있고, 야당도 별로 원치 않을 거국내각은 어려우니 당적이 없는 전문가들이 포진하는 중립내각이 될 것이라는 현실론도 있다.

어느 쪽이든 중요한 것은 '일을 제대로 할 수 있는' 내각을 만드는 것일 터인데 그런 면에서 몇가지 생각할 점이 있다.

우선 개각을 해도 기꺼이 들어가 일하겠다는 사람이 몇이나 있겠나 하는 것이다.

아직도 장관 자리라면 '태산 같은 성은(聖恩)' 운운할 사람은 많겠지만 제대로 일할 사람들 중 1년 남은 기간 동안 들어가 일하려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YS 정권 말기에 임명된 강경식 경제부총리, 김인호 경제수석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다들 보았던 터다. 현 정권은 이들을 법정에 세우는 우(遇)까지 범했다.이제 어려운 시기에 인재들이 나서기를 꺼린다면 자업자득이다.

이런 면에서 무늬만이 아닌 실질적 거국내각이 정답이다.

굳이 맡아달라면 끝끝내 거절하진 못하겠지만 소신있게 일하게 하려면 거국내각 속에서 일하도록 해줘야 한다. 최소한 경제팀만이라도 그렇게 짜야 한다.

이 때는 대통령이 야당과도 머리를 맞대고 국정을 논의할 생각을 해야 함은 물론이다.

어차피 한나라당은 요즘 금융실명제법 개정안, 국세기본법 개정안 등을 내놓고 예금비밀보호, 세무조사남용 금지 등의 정책을 활발하게 추진하고 있지 않은가. 정부와 여당이 반대해도 야당의 입법 활동으로 국정이 바뀔 판이다. 실질적 거국내각이라면 사실 당적이 있고 없고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지연.학연.나이를 떠나 고루 인재를 쓰면 그만이다. 쓸 사람이 별로 없다는 말은 자연히 사라진다.

한 예로 그간 정부에서 스스로 나가 민간 부문에서 경험을 쌓은 전문인력집단이 꽤 된다. 언젠가는 국가가 활용할 수 있는 인적 자원이다. 우리도 이제 인재들이 민관을 오가는 시스템을 정착시킬 때가 됐다.

야당도 거국내각에 적극 참여해야 옳다.

여당을 도와주는 것 아니냐는 계산을 할지 모르지만 국민은 무엇이 어느 누구의 평소 생각인지 안다. 그 생각이 선거 전에 미리 국정에 반영돼 좋은 평가를 받는다면 더 유리할 수도 있다.

*** 거국적 경제팀 구성을

여야정이 머리를 맞댄다면,예컨대 정부조직 개편도 현 정권 말기에 처리할 수 있다.이미 재경부.금감위.산자부.정통부.과기부 등의 조직과 기능을 정비해야 한다는 것은 거의 컨센서스가 됐다.

합의만 되면 떠나는 정권이 손을 대주고 새 정권은 바로 일을 시작하는 것이 가장 좋다. 거국내각 생각에 대해 정치 현실을 모르는 이상론이라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하루의 오후 세시는 서정일 수 있어도, 정권의 오후 세시나 역사의 오후 세시는 절박하다.

이르다고, 늦었다고 생각지 말고 시작해야 한다.

김수길 경제담당 에디터 sg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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