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돈·작은 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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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파킨슨」법칙에 「대재정」이라는 것이 있다. 큰 기업체 중역회의 첫 안건으로 원자로를 설치하는 문제가 상정되고 비용은 꼭 1천만 불이라고 나와있다. 의장이 원자로의 필요성과 1천만 불이라는 숫자가 나온 경위를 2, 3분 동안 설명한다. 중역들은 숙연하게 경청하고 있다가 이류가 있느냐는 질문이 나와도 묵묵부답.
안전의 기술적「디테일」에 대해서 아무도 아는 바가 없기도 하지만 1천만 불이라는 액수는 중역 개개인의 실생활에 비추어서 극히 비현실적인 큰돈이다. 기장은 재빠르게 가부를 묻고 안건은 즉각적으로 만장일치 가결을 본다. 1천만 불을 처리하는데 단 5분도 걸리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다음 안건으로 등장한 공장 직공들을 위한 자전거 주차소 설치 문제는 회사설립 이래 최대의 난항을 거듭하여 장장 다섯 시간의 격논 끝에 가까스로 승인된다. 소용되는 비용은 불과 2천3백50불. 그러나 중역들은 저마다 주차소의 필요성과 설계에서부터 공임과 재료비에 이르는 세목을 따진다. 마침내는 책상을 치는 사람, 퇴장하겠다고 위협하는 사람까지 나오고 결국 다섯 시간만에 과반수다수로 낙착을 보았을 때 중역들은 회사의 이익을 위해서 찬·반간에 큰 공헌을 했다는 자부를 안고 산회한다.
이 얘기의 교훈은 명백하다. 액수가 크면 클수록 현실감은 줄어든다. 1천만 불이란 큰돈을 만져 본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무슨 의혹이다, 또 무슨 부정이다 하고 뻔질나게 신문에 나는 희대의 추문에 얽힌 돈이 가령 억대나 10억대에 이르면 시정의 서민들은 잠깐 아연했다가 그만 잊고 만다. 개인의 생활 경험에 비추어서 전연 실감이 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액수가 적으면 적을수록 실감은 커진다. 미관 말직의 공무원이 몇천 원을 받아먹었다든지 대폿잔을 얻어먹었다는 얘기가 나오면 곧 말세가 왔다고 분통해 한다. 부정부패를 잡으려면 송사리가 아니라 민심의 허를 역이용하는 큰고기를 잡아야한다는 이치가 이것이다. 또 서민들이 지극한 반감을 가지고 지켜보는 10원, 백원, 천 원 단위의 적은 액수의 물가를 함부로 울리다가는 큰 코를 다칠 염려가 있다는 경고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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