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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지역 전통문화 ③ 석촌동 돌마리 대동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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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면

“석촌동을 예전엔 돌마리라 불렀어요. 마을에 돌이 많았죠. 집마다 담을 돌로 쌓았다니까요.”

고용길(58) 돌마리애향회 부회장이 말했다.

 “6·25 당시엔 지금 석촌호수 자리로 한강 본류였던 송파강이 흘렀는데 군인들이 도하를 하려고 우리 동네 돌로 강을 메웠다고 해요.”

신자선(60) 돌마리애향회장도 거들었다.

돌마리는 현 석촌동 백제초기 적석총 일대를 중심으로 형성됐던 마을이다. 이곳에도 마을제사가 있었다. 상달인 음력 10월 1일이면 세 신(三神)에게 제사를 지냈다. 제사 장소도 3곳이었다. 오봉산은 백제초기 적석총이 있는 자리다.

“정상에 무덤 같이 생긴 둔덕이 다섯 개 있어서 오봉산이라 불렀어요. 이곳에 백제총이 있을 것이라곤 생각지 못했죠(웃음).” 신 회장이 설명했다.

지게에 제사 음식을 다시 싣고 산을 내려와 찾은 곳은 ‘미륵암’이다. 마을 수호신을 모시는 도당이다. 동네 중심에 있었다. 마지막으로 찾은 곳은 송씨 부인을 모시는 ‘부군당(부근당)’이다. 한강과 탄천이 만나는 현 잠실종합운동장 부근에 있었다.

이 장소엔 전설이 있다. 조선시대 인조는 남한산성을 지으라고 이서 장군에게 명을 내린다. 이 장군은 산성 북쪽은 벽암대사에게, 남쪽은 이회 장군에게 맡긴다. 벽암대사는 승려를 동원해 산성 축조를 끝마쳤다. 반면 이회 장군은 공사 진행이 느리고 비용까지 모자란 상황이었다. ‘술과 여자에 빠져 공사가 늦어지고 돈까지 빼돌린다’는 소문이 무성했다.

이회 장군 처인 송씨 부인은 남편을 위기에서 구하기 위해 직접 공사 비용을 모으러 삼남(충청남북도·전라남북도·경상남북도를 지칭)지방으로 떠난다. 어렵게 돈을 모아 돌아오지만 남편은 누명을 쓰고 처형된 후였다. 송씨 부인은 통곡하다가 모은 쌀을 모두 강에 버리고 몸을 던진다. 이 자리를 쌀섬여울(미석탄)이라고 부른다. 이후 쌀섬여울을 지나는 배들이 난파되는 사고가 많이 일어나 부군당을 세워 송씨 부인을 기리니 사고가 사라졌다고 한다.

돌마리 동제는 70년대 초 강남개발이 시작되면서 잠시 중단된다. 89년 토박이들이 중심이 돼 ‘돌마리애향회’가 만들어진 후에야 다시 이어갈 수 있었다.

애향회는 조직 결성과 함께 돌마리경로당 옆에 5m 높이 ‘돌마리 애향비’를 세웠다. 제사 장소도 이곳으로 옮겼다. 동제 이름도 ‘돌마리 대동제’로 정했다. 비석 건립에 마을 공동 재산이었던 토지를 팔아 마련한 돈을 사용했다. 남은 마을재산 6000여 만원을 예금해 발생한 이자로 현재까지 제사 비용을 충당하고 있다. 일부 비용을 구청에서도 지원해 주고 있다.

  동제를 주관하는 신 회장은 바람이 있다.

  “지금 애향회원이 300여 명 정도에요. 우리도 언젠가는 세상을 떠나겠죠. 이로 인해 동제가 사라질까 걱정이네요. 우리 자손들이 고향에 애정을 갖고 동네 축제인 동제를 이어갔으면 해요.”

조한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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