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7)자유당 때 교통부장관 문봉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4·19이후 전 자유당 섭외부 김성주씨가 간첩혐의로 사형이 집행된 것이 아니라 고문에 의해 목숨을 억울하게 잃었다는 유족측의 항의로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은 일이 있었다. 이때 김씨와 가장 막역한 사이로 전 자유당 청년훈련부장과 교통부장관을 역임하면서 권력의 자리를 지켰던 문봉제(52)씨가 이 사건에 관련, 또 한번 세상을 놀라게 했었다. 『부하를 시기한 끝에 간첩으로 몰아 죽였다』는 세론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문씨는 그후 투옥되었으나 4개월만에 무혐의로 풀려 나와 지금은 인왕산 밑 한적한 20평짜리 부흥주택에서 과거를 되새기며 독서로 조용한 나날을 보내고있다.
『처음 김씨가 구속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대경실색했읍니다. 내가 오래 데리고 키운 사람이었으니까…. 당시 헌병사령부에 가서 증언을 했었는데 그를 변명해 주었던 것이 그만 모략을 받게된 근거가 되었읍니다』 이렇게 당시를 회상한 문씨는 흥분하는 기색도 없이 사건의 경위를 차근차근 풀어나갔다.
『처음 증언할 때 「사임」해준 것이 내 잘못이었죠. 4·19후 재조사 때 나가보니까 내 증언 내용이 모두 왜곡되거나 날조되어 있지 않겠읍니까.
김씨를 고문 치사해 놓고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 집행한 것처럼 조서가 꾸며져 있었는데 나도 여기에 한몫 낀 것으로 돼있었죠. 날조된 증언내용을 바로잡기란 지극히 어려운 일이었읍니다.
수많은 증인들과 대질심문, 결국 혐의가 없어 자유의 몸이 되었지만 그때 절실히 느낀 것은 사법이 공명정대해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이때부터 정치엔 염증을 느끼고 말았다』는 문씨는 『신문의 해설기사를 읽는 것이 유일한 공부』라 말하고 요즈음엔 『국사공부를 다시 하고있다』고.
일본대학 경제학과를 학병사건으로 중단, 고향인 평북 영변에 돌아가 해방을 맞은 문씨는 조만식 선생과 민족운동을 벌이다가 실패하고 1946년1월 이윤영씨와 월남, 서북청년회를 조직하여 반공투쟁의 일선에서 눈부신 활약을 했으나 『만년에 돌아온 것은 간첩과 관련이란 「아이러니컬」한 누명이었다』고 허탈하게 웃었다. 정치의 일선에서 물러나 1남6녀를 두고 인왕산을 오르는 일이 유일한 낙이 되었다는 문씨는 『배운 것이 정치인데 거기서 물러서니 다른 할 일을 잃었으나 마음은 그지없이 편하다』고 말하면서 정치엔 미련을 끊지 못한 듯 『자진해서 나갈 수 없으나 몸은 이미 국가에 바친 것이 아니냐』고 반문하기도 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