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라이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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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현수 감독의 신작 '라이방'을 마틴 스코세지 감독의 걸작 '택시 드라이버'와 비교할 필요까진 없겠다.

뉴욕의 소외된 삶을 집요하게 천착했던 거장에게 무례가 될 수 있다. 둘 다 택시기사가 주인공이지만 우울한 청색빛 드라마인 '택시 드라이버'와 달리 '라이방'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경쾌한 코미디다.

그런데도 '라이방'은 매력적이다. 시종일관 웃긴다는 점에서 '조폭 마누라'와 비슷하지만 그 웃음에 일상의 비애가 스며 있고, 또 웃음을 절대 강요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조폭 마누라'와 판이하다. 택시기사 세명의 웃지도, 울지도 못할 사연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가슴이 애잔해진다.

라이방은 선글라스의 대명사인 레이밴(Ray-Ban) 을 베트남식으로 발음한 것. 1960~70년대 베트남에서 보내온 병사들의 사진에 이 제품이 많이 나와 사람들은 라이방,라이방 하고 부르게 됐다. 영화에선 선글라스를 자주 끼는 택시기사들을 은유한다.

사실 택시는 작은 정치판이다. 온갖 승객들이 타고 내리며 사회를 걱정하고, 경제를 한탄한다. 여러 사람들이 근심을 털어놓는 해우소(解憂所) 같은 역할도 한다.

'라이방'은 바로 이같은 영화다. 우리 사회의 갖은 불만과 불평이 집결하는 택시를 다루고 있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택시를 몰게 된 기사 세 명이 얘기를 끌고 간다.

단돈 3백만원에 부유한 노인에게 팔려갈 운명인 옌볜 처녀를 짝사랑하는 노총각 해곤(김해곤) , 열여덟살짜리 딸을 몰래 키우면서 총각 행세를 하는 학락(최학락) , 두 번이나 이혼하고도 결혼 자금을 만들어내라는 형에게 시달리는 준형(조준형) 이 그들이다.

특기 사항은 영화화에 앞서 99년 말 두달간 부산에서 연극으로 공연했다는 점. 당시 배우들이 영화에 고스란히 투입돼 활기가 넘친다. 시나리오도 각 배우들의 개성에 맞게 썼다고 한다.

'라이방'의 인물들은 우리 사회의 성공신화를 비켜간 아웃사이더들이다. 감독은 그들의 갑갑한 일상을 따라가며 우리가 잊고 싶어 하는 '주변인의 고단함'을 환기시킨다.

낡은 반바지 차림의 돌쇠형 해곤,쪽 빠진 옷에 라이방을 걸친 양아치형 학락, 항상 기사복만 입는 모범생형 준형, 이들 세 명은 싸구려 호프집에서 술를 마시며 "열심히 살아도 이 모양 이 꼴"이라며 신세타령을 늘어놓는다.

중간 중간 "대통령도 도둑질하다 감옥에 갔다"는 식의 사회.정치적 발언도 삽입되지만 감독은 이들의 숨막힐 듯한 일과를 중심으로 한국 사회의 그늘을 보여준다. 자칫 우울하게 흐를 수 있는 줄거리를 TV 코미디극 같은 농담과 몸짓으로 풀어가되, 그렇다고 경박한 수준까진 빠지지 않는다.

아쉬운 구석도 있다. 회사 상무에게 목돈을 떼인 그들이 부자 할머니의 집을 터는 모습은 값싼 활극을 닮았고, 세상을 풍자하는 방식이 내내 직설적이라 때론 경박한 느낌을 준다.

'게임의 법칙''본 투 킬' 등 폭력세계를 주로 그렸던 장감독의 성공적 변신이 주목되지만 종종 웃음의 수위를 낮추고 인물들의 내면을 들여다보았으면 하는 욕심도 든다. 꺼벙한 정비공과 순진한 경리사원의 로맨스도 소품 비슷하게 희화화한 모양새다.

11월 3일 개봉. 18세 관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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