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예산 의원들 고개 들고 귀국하겠는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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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사상 처음으로 해를 넘겨 예산안을 처리한 주역들이 며칠 전 중남미와 아프리카로 단체 외유를 떠났다. 국회 예산결산특위원장인 장윤석, 여야 간사인 김학용·최재성 의원 등 9명이다. 한 팀은 멕시코·코스타리카·파나마, 다른 팀은 케냐·짐바브웨·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 향했다. 명목은 예산심사시스템 연구라고 한다. 한눈에 봐도 우리와 비슷하거나 우리보다 뒤처진 나라들인데 무엇을 배우겠다는 건지 의아하다. 세렝게티 초원에 있어야, 독재국가를 봐야 선진 시스템이 떠오른단 말인가. 차라리 한 해 예산을 심사하느라 심신이 고달파 머리 식히러 떠났다고 하면 설득력이 있겠다.

 해당 의원들이야 예산국회가 끝난 뒤 관행적으로 이뤄져 온 외유라고 해명하고 싶을 거다. 일종의 ‘의원외교’라고 하고 싶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해명을 곧이곧대로 받아주기엔 이번 예산국회는 해도 해도 너무했다.

 국가 예산 342조원을 호텔에서 밀실 계수조정을 통해 확정했다. 수천 장에 이르는 ‘쪽지 민원 예산’을 받아줬다. 이 중 지역구 민원 예산만 5000억원대다. 여야 모두 한 입으로 폐지하겠다던 의원연금 128억원은 통과시켰다. 대신 국방예산 4900억원과 극빈층 지원 예산 2824억원을 삭감했다. 말로만 서민·복지를 앞세웠지 의원들 잇속 챙기기에 바빴다. 대선 때 서로 죽기살기로 싸우더니 국민의 혈세를 앞에 두곤 흥청망청했다. 오죽하며 한 예결위원이 “솔직히 낯뜨겁고 잘못됐다고 생각한다”고 고백했겠는가.

 국민적 실망감은 이만저만 큰 게 아니다. 외유 비용 1억5000만원을 토해내라거나 예산심사시스템 연구 결과를 대국민 기자회견을 통해 발표하라는 건 그나마 점잖은 축에 속하는 요구다. 대다수는 이름을 꼭 기억해 낙선운동을 벌이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재입국을 불허하라는 목소리도 있다. 분명한 건 이들 의원이 고개를 들고 입국하긴 어려울 거란 사실이다.

 불과 10여 일 전까지 정치권은 새 정치를 하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귓가에 쟁쟁할 정도다. 그런데도 이런 일을 벌였으니 국민의 인내심을 더 이상 시험하지 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