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나] 산악인 엄홍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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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락이 눈높이에서 치는 8천m 이상 고봉을 오를 때마다 배낭 속엔 2~3권의 책이 들어있었다. 한달 이상 고산에 체류하는 동안 책읽기는 생각 이상으로 근사한 소일거리다.

베이스캠프가 위치한 해발 4천~5천m 1인용 텐트 속에서 손을 호호 불며 책 읽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내일 날씨는 좋을까, 등반은 잘될까 하는 불안을 떨치려 발전기 등불 밑 슬리핑백 안에서 손만 내놓고 책장을 넘기는 모습을….

산을 타는 나는 도적적이고 탐험심을 자극하는 책과 함께 불교관련 책을 주로 본다. 최근 감명깊게 읽은 책은 『살아있는 한 우리는 절망하지 않는다』(뜨인돌).

저명한 탐험가 새클턴 경이 생사를 넘나든 5백37일간의 남극 횡단 실화를 다룬 이 책을 잡는 순간부터 손을 떼지 못했다. 같은 책이라도 어디서 읽느냐에 따라 느낌이 다르다.

극한상황에서 자신과 타인에 대한 신뢰를 잃지 않고 난국을 극복하는 과정은 바로 현재 나의 이야기로 느껴지면서 어떻게 이렇게 처절한 순간에서 살아날 수 있을까, 나라면 버텨낼 수 있을까를 생각한다.

등불을 꺼야할 시간도 잊게 했던 이 책을 특히 청소년들에게 권해주고 싶다.

달이 한 뼘 가까이 보이고, 어마어마한 별이 비오듯 쏟아지는 밤에 읽은 『자전거를 타는 여자』(김미진 지음.중앙M&B)도 잊을 수 없다.

에베레스트 로체 남벽을 배경으로 한 이 소설에서 산사나이들의 고독 그리고 운명적 사랑과 비극에 몰입하면서 한편으로 나는 누구인가를 생각했다. 냉혹한 자연속에서 겸손할 수밖에 없는 나는 자연스레 불교서적에도 관심을 갖게 됐다.

숭산스님의 제자 현각스님이 쓴 『만행』 『선의 나침반』(열림원), 무심스님이 쓴 『온 세상은 한송이꽃』(현암사)이 가슴에 남아 있다. 14좌 등반을 하는 동안 8명의 동료를 잃었다.

극한 상황에선 삶과 죽음이 눈을 깜박이는 찰나도 아니다. 달라이라마의 여러 책들도 마음의 안정을 찾는 데 도움을 주었다.

사실 최고의 교과서는 산 그 자체다. 나의 모산(母山)은 도봉산이다. 도봉산이 있었기에 히말라야도 오를 수 있었다. 처음 등정할 때 한없이 흐르던 눈물을 잊지 못한다.

이젠 상대적으로 소홀했던 '책의 산'을 제대로 올라가 볼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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