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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청률 따라 드라마 길이 제멋대로

중앙일보

입력

최근 드라마부문에 강세를 보이고 있는 민영방송SBS가 시청률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드라마 길이를 당초 기획과는 달리 무리하게 늘리거나 줄임으로써 시청자들의 빈축을 사고있다.

SBS는 최근 부진한 시청률을 보여온 「아버지와 아들」을 오는 28일 제30회를끝으로 종영시키기로 결정했다.

「아버지와 아들」은 방송시작후 12% 내외의 시청률을 보여왔는데 이 수치는 주말드라마로서는 저조한 편에 속한다.

결국 아버지와 아들의 바람직한 관계에 대해 고민할 시간을 마련해준다는 의도로 기획돼, 시청자들에게 사람 냄새 나는 진솔한 드라마라는 평가를 받았던 이 드라마는 방송사의 고질적 병폐인 시청률 논리에 밀려 20회나 앞당겨 조기종영하게 된것. 이에따라 연기자, 스태프의 볼멘소리가 터져나오는 것은 물론이다.

한편, 이 드라마의 인터넷 시청자 게시판에는 "모처럼 등장한 좋은 드라마를 단지 시청률이 낮다는 이유로 조기종영하는 방송사의 행태에 동의할 수 없다"는 비난이 빗발치고 있기도 하다.

연출자 김한영PD는 "아직 하고싶은 이야기의 3분의 1밖에 털어놓지 못했는데,회사에서 갑자기 조기종영 결정을 내려 굉장히 안타깝다"며 "이 드라마를 즐겨보던많은 시청자들에게 미안할 따름"이라고 말했다.

SBS는 지난 6월에도 수목드라마「로펌」을 조기종영한다는 방침을 정했다가 연기자들의 거센 반발에 부딪혀 철회한 바 있다.

시청률 40%를 상회하며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는 월화드라마「여인천하」에 관해서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SBS는 당초 50회로 기획했던 이 사극이 시청률 '고공비행'을 시작하자 지난 5월말 94회로 늘리기로 했다고 발표한 바 있으며, 이제는 140회까지 방송한다는 방침을 굳혔다. 140회면 내년 4월까지 전파를 탄다는 말이다.

드라마의 길이가 원래 기획보다 3배 가까이 늘어나다보니 긴장감이 떨어지고,한가지 소재를 갖고 오랫동안 우려먹으면서 시청자들의 식상감을 자아내는 것은 당연한 일. 한번 재미를 붙이게 되면, 좀처럼 다른 드라마로 채널을 돌리기가 어려운사극의 특성상 시청률은 꾸준히 유지되고 있지만, 시청자들이 경빈과 문정왕후의 끝없는 권력다툼에 싫증을 느끼기 시작했다는 것은 인터넷을 통해 확인되고 있다.

한편, 올해 들어서는 잠잠하지만 KBS나 MBC도 지난해까지 시청률에 따라 드라마길이에 변화를 주면서 각종 '무리수'를 띄우는 일이 적지 않았다는 점을 시청자들은기억하고 있다.

공중파 방송사들이 이처럼 시청률에 연연해 드라마를 조기종영시키거나, 한없이늘리는 것은 광고수입을 고려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실은 방송사 자체의 자존심에서 비롯된다는 말이 더 정확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드라마 길이를 애초 기획과는 달리 방송사 마음대로 늘이거나 줄이는 것은 '몇회짜리 드라마를 통해 어떤 주제의식을 전달하겠다'고 하는 시청자와의 약속에 등을 돌리는 행위라는 점에서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관계자들은 입을 모은다. 시청률이 5%에 불과하더라도 관심을 갖고 지켜보는 적지않은 시청자들이 있다는 것을각 방송사의 제작진 및 간부들은 기억해야 한다는 것. 또한 시청률 지상주의로 인해양질의 드라마들은 빛을 보지 못한 채 사장되고, 자극적이고 천편일률적인 드라마들만이 양산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기도 한다.

경실련 미디어워치의 김태현 간사는 "방송사에서 긴 안목을 갖고 시청자와의 바람직한 관계를 유지해나가기 위해서는 눈앞의 시청률에 따라 드라마의 길이를 마음대로 재단하는 행위를 피해야할 것"이라며 "구조적으로는 방송 전에 프로그램의 제작을 모두 마치는 사전전작제가 정착돼야할 것 같다"고 말했다.

(서울=연합뉴스) 최승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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