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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한「크리스마스」를 맞기 위하여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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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크리스마스」는 이제 종교적 의식에서 하나의 사회 풍속으로 화한 축제가 되어버렸다. 「거룩한 밤」이 「추잡한 밤」으로 바뀌고 「고요한 밤」이 「소란한 밤」으로 변했다고 한탄하는 사람들이 많다. 특히 10대청소년의 풍기물란을 비롯한 「크리스마스·이브」의 탈선행위는 해를 거듭할수록 심각한 사회문제로 「클로즈업」되어가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교회보다 「호텔」이 더 붐비고 「크리스마스·캐럴」의 경건한 합창보다는 취한들의 고성방가의 소리가 더 높아진 것을 힐책하기 전에 어째서 이처럼 「크리스마스·이브」가 이성을 잃은 밤이 되었느냐 하는 문제를 한번 반성해보아야 될 것 같다.
누가 그들을 광란케 했는가. 누가 그들을 사치스럽게 만들었는가. 누가 그들을 심야의 밤거리를 헤매게 하였으며, 누가 그들을 음란한 몸짓으로 밤을 지새우게 했는가. 그것은 결코 「크리스마스」의 주인공인 예수가 아니라 이사회를 병들게 한 우리들 자신 속에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첫째 해방 후 20년 동안 우리는 「금지된 밤」속에서 생활해왔다. 극소수인 특권층을 제외한 모든 국민들은 오랜 통금 속에서 밤의 풍속이 억압되었었다. 그러기 때문에 밤의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도 통금 없는「크리스마스·이브」는 경건할 수만은 없게 된 것이다. 밀리는 철야의 인파를 욕하기보다 도리어 동정을 해야만 될 우리들이다.
만약에 통금제도라는 불구의 밤이 우리의 발을 묶어두지 않았던들, 결코 「크리스마스·이브」는 이처럼 어지럽지는 않았을 것이다. 「크리스마스·이브」의 비정상성은 곧 통금제도라는 비정상성에 그 근원이 있는 것이다. 막힌 물일수록 터놓을 때는 혼탁의 격랑을 이룬다는 사회심리의 한 역학이다.
둘째는 우리사회의 인간관계가 아직도 폐쇄적이란 데서 그와 같은 혼란이 빚어진다고 할 수 있다. 10대의 청소년들이 「크리스마스·이브」에 탈선행위를 한다는 것은 물론 정당화 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들을 탓하기에 앞서 묻고 싶다. 과연 몇 사람이나 10대의 심리를 이해해주는 어른들이 있는가. 우리는 그들에게 자연스러운 교제를 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주기 위해 노력했는가. 10대들이 건강하게 뛰어 놀 수 있는 광장이나 건실한 오락장과 사교장이나, 그렇지 않으면 한 가정에 있어서 평소에 「파티」를 열어준 일이 있었던가. 곧잘 외국의 예를 들어 경건한「크리스마스·이브」를 지내라고 충고하는 사람은 많아도, 그들처럼 우리의 10대들에게 자유로운 남녀교제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지 못한 것을 반성해보는 사람은 드물다. 금제로만 일관된 그 10대가 「크리스마스·이브」에 소란을 피우게 되는 것은 그들만의 잘못도 아니다. 10대뿐만 아니라 비교적 인간관계가 외국처럼 개방되어있지 못한 우리사회에 있어서 모처럼 사람끼리 어울리는 그 축제의 밤은 광란해 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셋째로는 우리사회가 그만큼 긴장되어있고 가난하다는데서 모든 축제가 유난스러워진다는 그 변태의 결론을 얻을 수 있다. 억압된 나날, 빈곤의 연속, 우울과 실의 반복 이러한 ,감정이 마치 연약한 지표를 뚫고 폭발하는 화산처럼 무슨 계기가 있으면 곧 터져 나오기 마련이다. 정치와 경제의 빈곤이 역설적으로 표현된 것이 바로「크리스마스」의 사치이며, 유흥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크리스마스·이브」를 맞이하면서 경건하고 고요한 밤을 지내자고 하는 말은 한낱 실효를 잃은 장식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럴만한 이유, 그럴만한 원인을 제거하지 않고서는 「크리스마스·이브」의 병리를 고칠 수는 없을 것이다.
진정으로 「크리스마스·이브」의 평화와 사랑을 아쉬워하고 있는 민족이 있다면, 불행과 억압과 가난 속에 사는 우리들일 것이 틀림없다. 다만, 그 광란 속에서도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것이 있다면, 추위 속에서도 피어나는 「포인세티아」의 붉은 꽃 이파리처럼, 혹은 백설에 뒤덮인 푸른 전나무가지처럼, 동방박사가 찾아간 그 크고 빛나는 암흑 속의 별처럼, 불행의 밤을 극복하는 사랑의 의지일 것 같다.
가난한 사람들, 병든 사람들, 절망 속에서 헤매는 사람들이 이들과 함께 평화와 자전과 사랑을 나누는 그「크리스마스」의 온정이 있을 때, 이 병든「크리스마스·이브」의 그릇된 길이 바로 잡히리라 생각된다.
위정자는 「크리스마스」를 맞이하여 통금만 해제해주는 일시적인 선심이 아니라 국민들에게 과연 무엇을 봉사할 수 있는가를 생각해야 할 것이고, 부유한 자들은 가난한 자에게 무엇을 도울 수 있는가를 반성해보아야 할 것이고, 어른들은 귀여운 자녀들에게 어떠한 사랑을 베풀어야 할지를, 그리고 건강한 사람은 병든 자에게 어떠한 용기를 주어야하는가를 한 번쯤 고요히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교인이든 아니든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위해 봉사하는 날 그것이 「크리스마스」의 논리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서로 돕는 생활, 억압된 생활에 사랑과 자유를 베푸는 마음, 그것이 생활화할 때 비로소 우리의 「크리스마스·이브」도 남들처럼 경건하고 고요하고 아름다운 밤이 될 것이다.
「메리·크리스마스」-혼탁된 생활 속에서도 우리는 인사를 나누자. 보다 건강한 「크리스마스·이브」를 맞기 위해서 다시 한번 인사를 나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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