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표이중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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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서양은 [아이의 나라]이며 동양은 [노인의 나라]라고 말한 것은 중국의 철학자 임어당의 주장이다. 그는 그 예로서 사표 쓰는 방식의 강의를 들고 있다. 서양사람들은 직장을 그만둘 때 그 이유를 명백히 밝히지만, 점잖은 동양사람들은 결코 그런 것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비록 마음이 언짢아서, 조건이 좋지 않아서, 그 자리를 떠난다 하더라도 상대방에 상처를 주지 않으려 한다. 그래서 언제나 개인사정이라든지 건강상 이유를 내세운다. 그만큼 동양인들은 노련하고 의젓하다는 견해이다. 정말 그렇다. [아이젠하워]의 집권 시에 [맥로이] 국방장관은 급료가 적어 그만둔다고 말한 적이 있다. 아내의 불평이 대단해서 보수가 좋은 전직 ([카메이] 비누공장의 중역)으로 다시 돌아가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나라의 장관들은 타의든 자의든 물러설 때는 으례 일신상 사정이 아니면 건강상 이유라고 한다. 물론 장관을 그만둘 정도가 되면 누구나 울홧병이 일어날 것이기에 건강상 이유란 것도 거짓말은 아닐 것 같다.
문제는 왜 울홧병이 났느냐? 즉 진짜 사표의 이유가 무엇이냐 하는 궁금증이다. 그래서 동양인의 사표는 사군자처럼 품위는 있되 늘 [퀴즈]문제집 같다. 표면상이유와 이면의 이유가 기묘하고 복잡한 사표 이중주를 연출한다.
민정후 세번째로 재무장관이 사직했지만, 이번 홍재무도 역시 건강상이유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사표의 [퀴즈]를 놓고 이러니 저러니 해답이 구구하다. 왜 그만두었을까? 자의인가? 타의인가? 정책의 차질인가? 재무부에 무슨 탈이 생겼는가? 국민들은 진짜 병을 알고싶어한다.
장관의 사표뿐만 아니라 일반사무원의 사표라 하더라도 명백한 이유를 공표하는 것이 좋다. 점잖은 것보다는 명백한 것이 좋다. 직장이 분위기가 나빠서… 급료가 싸서…사장이 독재를 해서… 본인은 사표를 낸다고 적는 편이 애꿎은 건강상 이유보다는 도움이 된다. 그래야 국가나 회사의 운영에 참고가 되고 뒷말이 없다. 사표에서 [건강상이유]가 자취를 감추는 것도 근대화의 한 숙제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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