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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흉악범은 모두 사형시켜야 하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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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이주원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한국 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준 일련의 흉악범죄 사건의 재판이 최근 선고에 이르렀다. 그런데 해당 피고인에 대해 사형 아닌 무기징역형이 연이어 선고됐다. 그러자 사회 일각에서 ‘국민의 법 감정을 무시한 온정주의적 판결’이라는 비판이 봇물처럼 쏟아지고 있다.

 20대 여인을 납치·살해하고 시체를 358조각으로 자른 피고인, 등교하던 여자 초등학생을 성폭행하려다 살해하고 암매장한 피고인에 대해 각각 무기징역형이 선고됐다. 제주 올레길에서 여성 관광객을 강간하려다 살해한 피고인에 대해 국민참여재판을 통해 징역 23년이 선고됐다. 유치원 자녀를 배웅하고 돌아온 주부를 강간하려다 살해한 피고인에 대해서도 무기징역형이 선고됐다.

 사형이 아닌 무기징역형 또는 장기징역형이 선고된 이러한 판결에 대해 심지어 ‘피해자가 담당 판사의 가족이었다면 그렇게 판결했을 것인가’라고 힐난하는 사람도 있다.

 지난해 이맘때 한국이 사형집행 중단 5000일째를 맞이하자 법률적으로도 사형제의 완전한 폐지를 촉구하는 여론이 비등했던 것과 비교하면 갑자기 180도 뒤바뀐 형국이다. 물론 한국 사회의 보통 시민이라면 어느 누구도 이러한 흉악범죄에 대해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을 것이다. 유족의 슬픔과 분노에 대해서도 공감하지 않을 리 없다.

 그러나 잠시 흥분을 가라앉히고 차분히 생각해 보자. 과연 흉악범들을 모조리 사형에 처하는 것이 올바른 일인지, 사형을 선고하지 않았다고 해서 법원의 판단을 비난하는 것이 온당한 일인지 의문이 든다. 그리고 흉악범에게 사형을 선고하거나 집행한다고 해서 과연 범죄 예방효과가 있는지도 의문이다.

 형사정책적 관점에서 보면 가혹한 형사특별법의 양산이나 극형·중형의 반복적 선고만으로 범죄 통제의 문제가 궁극적으로 해결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로지 강도만 높은 처벌은 감정적·임기응변적 미봉책에 불과하다. 이러한 엄벌주의의 남발은 사회의 평화질서를 구축하기보다는 오히려 규범과 양형의 인플레이션, 사회의 공격성을 촉진하는 역기능을 초래한다.

  사형제의 존폐 문제는 사법사상 가장 오래된 난제 중 하나다. 사람마다 가치관이나 신념에 따라 찬반의 견해가 다를 수 있다. 프랑스 철학자 알베르 카뮈는 1957년 출간한 책 『단두대에 대한 성찰』에서 “우리 가운데 누구도 절대적인 결백을 내세울 수 없고, 그 때문에 누구도 절대적 판관으로 자처할 수 없으며, 죄인 중의 죄인이라도 그를 제거할 것을 최종적으로 명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81년 사형제를 폐지한 프랑스도 폐지 당시 국민의 3분의 2가 사형제 폐지를 반대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사형제가 폐지된 명분과 논리는 무엇일까. 당시 프랑스 의회는 국민의 다수가 원해서가 아니라 올바른 입법이야말로 궁극적으로 국민의 뜻을 존중하는 것이며, 그것이 민주주의 원칙이라는 확신 때문에 사형제를 폐지했다고 한다. 사형제 찬성론이라도 판단자의 불완전성 등을 고려할 때 국가의 개인에 대한 사형선고가 극히 신중해야 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사법부는 본질적으로 다수결의 원칙이 지배하는 민주주의하에서 소외된 소수자의 권익을 법률 판단을 통해 보호하는 권리보호기관이다. 흉악범에 대해 다수가 사형을 찬성하더라도 반드시 사형을 선고해야 하는지의 문제는 보다 진지하고 심도 있는 고민이 필요하다. 그 최종적인 판단은 당연히 법원의 몫이다. 다수의 논리에만 의존한다면 소수자의 인권 보호라는 사법제도의 존재 의의는 애초부터 달성하기 불가능하다. 아울러 진지한 고민을 통해 내려진 법원의 판단을 단지 견해가 다르다는 이유로 일부 국민이 존중하지 않는다면 사법 시스템의 건전한 작동은 한낱 신기루에 불과하다.

이 주 원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