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철호의 시시각각

안철수의 상식과 비상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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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이철호
논설위원

귀를 의심할 정도였다. 어제 안철수(이하 경칭 생략)의 캠프 해단식 연설 이야기다. 그는 “단일후보 문재인을 성원해 달라”는 열흘 전 사퇴 선언에서 한 발짝도 더 나가지 않았다. “지지자들이 제 뜻을 받아주실 것”이란 애매모호한 표현에 그쳤다. 안철수는 오히려 “지금 대선은 거꾸로 가고 있다”며 여야를 싸잡아 비난했다. 문재인을 대놓고 지지하면 선거법에 걸리는 사실을 의식했는지 모른다. 그럼에도 민주당의 기대치를 한참 밑도는 수위에 머물렀다. 거꾸로 안철수는 자신이 문재인의 사람이 아니고, 그를 위해 정치적 생명을 바칠 필요도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한 게 아닌가 싶다.

 민주당은 속으로 멘붕(멘털 붕괴) 상태다. 솔직히 민주당이 안철수에게 손을 벌리는 것은 염치없는 일이다. 외곽 세력까지 가세해 단일화를 윽박지르다 막상 양자 대결에서 밀리자 안철수 잡기에 혈안이 되고 있다. 2선으로 물러난 이해찬을 재빨리 전면에 내세운 것도 신경에 거슬렸다. 두 사람의 안보와 대북 공약은 아득히 거리가 멀었다. 문재인은 “안희정 충남지사가 전국적인 차세대 정치지도자로 커 나가도록 제가 함께 하겠다”며 안철수에게 확인사살까지 했다.

 토라진 낌새를 눈치챈 민주당은 지난 주말 유세부터 안철수·박정희·노무현이란 표현을 쏙 뺐다. 앞서 민주당은 지난달 27일에도 세종문화회관 앞 유세 일정을 잡아놓았다. 안철수가 캠프 해단식을 마치고 곧바로 쉽게 이동할 수 있도록 동선을 짠 것이다. 하지만 공교롭게 하루 전 빌딩 옥상에서 자살 시위가 벌어지는 바람에 물거품이 됐다. 어제도 민주당은 세종문화회관 앞 유세 일정을 똑같이 잡아놓았다. 오랫동안 안철수의 출현을 눈 빠지게 기다렸지만 허사였다.

 양쪽 캠프를 잘 아는 인사들은 안철수의 좌절을 캠프 분위기에서 찾는 경우가 많다. 문재인 캠프는 운동권 대학생들의 동아리 같은 느낌이다. 시위를 앞두고 밤새 화염병을 만드는 결연한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집권의 단맛과 폐족(廢族)의 쓴맛을 모두 맛본 만큼 대선에 목숨을 거는 건 당연하다. 그런 육식동물의 본능이 한때 안철수를 처절하게 물어뜯었던 게 아닐까 싶다. 이에 비해 안철수 캠프는 초식동물처럼 느슨하고 느긋했다. ‘강남 좌파’의 집합처나 다름없었다. 캠프에는 변호사와 교수, 외국 유학 출신의 석·박사들이 넘쳐났다. 시민단체 출신들은 ‘좋은 일 한다’는 순진한 입장이었다. 한마디로 절박성에서 안 캠프는 문 캠프에 패배했다.

 안철수는 후보 사퇴를 내던지며 깨끗하게 패배를 인정하지 않았다. “국민과 약속을 지키기 위해” 억울하게 사퇴한다는 뉘앙스를 풍겼다. 일주일간 장고 끝에 내놓은 캠프 해단식 연설문도 냉정하게 보면 양다리 걸치기 식의 애매한 표현이 적지 않다. 이런 배경에는 자신의 모함(母艦)인 ‘안랩’에 대한 의식이 작동한 게 아닐까 싶다. 안철수는 “건너온 다리를 불살랐다”고 했다. 계속 정치적 영향력을 가져야겠다는 우회적 표현이다. 안랩은 공공부문과 대기업들에 컴퓨터 백신을 납품해 살아간다. 2007년 무료백신을 배포한 네이버에 “대기업이 토종 중소기업을 죽인다”는 내용증명까지 보내며 반발한 기업이다. 자칫 섣부른 도박으로 차기 정부에 미운털이 박히면 안랩의 생존 자체가 불투명해질지 모른다.

 안철수는 세상을 상식과 비상식으로 구분했다. 정작 자신은 비상식적인 돌출 정치를 자주 구사했다. 서울시장 선거에서 50%의 지지율이 5% 지지 후보에게 쿨하게 양보했다. 느닷없는 단일화 협상 중단이나 일방적인 후보 사퇴도 상식의 허를 찔렀다. 그는 어제도 문재인 지원보다 새 정치의 ‘마이웨이’ 쪽에 방점을 찍어 다시 한번 모두를 어리둥절하게 했다.

이제 연말 대선은 박근혜 vs 문재인의 맞대결 구도로 잡히면서 잔불 정리로 접어드는 느낌이다. 1987년부터 25년간 후보등록 이후 첫 여론조사에서 1위를 한 후보가 당선되지 않은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남은 변수라면 안철수가 언제 다시 기상천외한 묘수를 들고 나올지, 또 하나 마지막 TV토론이 기다리고 있다는 점이다. 과연 문재인이 오차범위 부근까지 벌어진 지지율을 막판에 뒤집어 새로운 대선 역사를 쓸 수 있을지 지켜볼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