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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북에 땅 투기 광풍, 벼락부자 된 김기덕·홍종화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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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벌판을 달리는 만주철도. 만주와 한반도를 잇는 길회선(길림~회령)의 종단항으로 나진이 선정되면서 함경북도에 유례 없는 부동산 광풍이 일었다. [사진가 권태균]
1 청진의 미생정 거리. 만주사변 이후 청진·웅기 등의 부동산이 급등했다.
2 김기덕. 부동산 광풍 덕에 일약 식민지 조선 제일의 갑부로 뛰어올랐다.

1930년대 한반도의 가장 오지였던 함경북도에 부동산 광풍이 불었다. 우울한 식민지의 잿빛 공기를 단숨에 황금빛으로 바꿔버린 황금광 시대처럼
느닷없이 함경도 오지에 부동산 광풍이 불면서 몇몇 행운의 벼락부자들이 탄생했다. 일제의 대륙 침략이 낳은 산물이었다.

1932년 여름, 한반도 최북단 함경도 청진(淸津)과 웅기(雄基) 땅값이 들썩거렸다. 오지였던 관북(關北:함경도)의 땅값이 들썩거린 것은 대륙 진출의 관문(關門)으로 유력시된다는 정보 때문이었다.

일제는 1928년 10월께부터 대륙 침공을 목적으로 만주의 길림(吉林)과 함경도 회령(會寧)을 잇는 길회선(吉會線) 철도를 부설했는데, 이를 연장하는 동해의 종단항(終端港)을 만들겠다는 계획이었다. 종단항은 1932년 3월 건국된 만주국 진출의 관문이 될 것이었다. 이전에는 주로 요동반도 대련(大連)이 일본과 만주 사이의 중간기지 역할을 했지만 동해의 종단항을 세워 그 역할을 대신시키겠다는 뜻이었다.

동광 1932년 11월호에 이윤재(李允宰)는 청진과 웅기 기행문을 실었다. “내가 청진에 도착하기는 8월 중순. 그리고 경성(鏡城)에 갔다가 일주일쯤 뒤에 도로 청진에 들러 웅기항에 이르렀다. 이때 웅기의 전시가(全市街)는, ‘땅!’, ‘돈!’ 하는 소리로 가득 찼다.”

일제는 드디어 그해 8월 25일 종단항을 발표했는데 정작 선정된 곳은 청진도 웅기도 아닌 청진 동쪽의 나진(羅津)이었다. 나진은 함경북도 경흥군 신안면에 소속되어 있던, 불과 20호 미만의 작은 어촌(漁村)이었다. 그곳에 갑자기 거센 부동산 광풍이 불었다.

이윤재가 쓴 앞의 기행문 제목이 ‘나진만(羅津灣)의 황금비’였던 데서도 광풍의 세기를 짐작할 수 있다. 이윤재는 ‘와글와글 브로커들이 몰려들어 여관마다 대만원이고 가로에는 밤낮없이 사람들의 어깨가 서로 부딪쳐서 실로 공전의 대활기를 띠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윤재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1평에 불과 2전, 3전 하던 것이 지금은 일약 10원, 20원까지 올랐다’고 덧붙였다. 몇몇 곳은 30, 40원으로 뛰기도 했으니 삽시간에 무려 수천 배가 올랐던 것이다. 이윤재가 “금후 대륙과 일본의 교통은 나진이 중심이 될 것이고 장차 대련과 해삼위(海蔘威:블라디보스토크) 등의 번영을 빼앗을 것”이라고 예견한 것은 과장이 아니었다.

김기덕, 국제무역 하다 땅 450만 평 구입
부동산 광풍에 수많은 희·비극이 연출되었다. 한 투기꾼이 1000평짜리 산을 평당 8원씩에 매입했는데 산 주인은 모두 8원이라는 줄 알았다. “8000원을 받은 땅 임자는 넋 잃은 사람같이 아무 말도 못하고 덜덜 떨기만 하다가 돌아가서 이내 실신한 사람이 되고 말았다”는 일화와 함께, 30원으로 일주일에 20만원의 거금을 번 청년의 일화도 전해진다. 반면 수년 전에 수만 평을 샀다가 종단항 결정 몇 개월 전 원가에서 밑지면서 판 사람의 이야기도 전해졌다. 그 땅에 시가지가 들어설 예정이라서 후에는 평당 200원씩 될지도 모른다는 소식에 “추회막급(追悔莫及)이라며 가슴을 치고 통곡했다”는 소식도 전해졌다.

이윤재는 “나진에 수만 평씩 가진 청진의 김모(全某), 나남(羅南)의 홍모(洪某)… 같은 행운의 대지주들은 오늘날 어떻게 되었겠는가?”라고 대지주들을 거론했다. 청진의 김모가 김기덕(金基德), 나남의 홍모가 홍종화(洪鍾華)인데 삼천리 1932년 12월호는 “두 사람의 재산을 어떤 재계 전문가가 추산하는 바에 의하면 약 1000만원을 넘는다고 한다”면서 식민지 최대 부호 순위가 바뀌고 있음을 알리고 있다.

그러나 김기덕과 홍종화는 우연히 벼락부자가 된 사람들이 아니었다. 함경도 부령(富寧)의 한미한 농가에서 태어난 김기덕은 별다른 교육을 받지 못했다. 청진으로 이사한 김기덕은 조선과 러시아, 만주를 잇는 국제무역에 뛰어들어 기반을 닦았다.

이 무렵 자본주의 제국들 사이의 식민지 쟁탈전인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해 전쟁 특수가 일고 러시아 혁명까지 가세해 그 여파가 시베리아와 한반도 북부까지 밀려들자 김기덕은 루블화 장사에 나섰다. 제정 러시아의 500만 루블을 매입했는데, 일화(日貨) 1원에 1원20전~1원30전 하던 루블화는 점차 40전까지 떨어졌다가 볼셰비키 정권이 시베리아까지 장악하면서 휴지로 변하고 말았다. 제정 러시아의 승리에 운명을 걸었지만 볼셰비키가 승리하면서 망한 것이었다.

그러나 김기덕은 좌절하지 않고 해산물·목재 무역을 계속하면서 부동산에 뛰어들었다. 비록 오지이지만 석탄과 목재와 해산물이 풍부한 북관의 미래를 낙관한 그는 상공업의 요지가 될 만한 부동산을 미리 사서 파는 수법으로 백만장자가 되었다. 물론 모든 투기가 그렇듯이 실패도 해서 조선은행에 50만원의 빚이 있었다.

그는 나진과 웅기를 주목해서 웅기에 300만 평, 나진에 150만 평의 토지를 샀다. 나진항을 감싸는 천혜의 방파제 역할을 하는 대초도(大草島) 80만 평과 소초도(小草島) 40만 평도 몽땅 사들였다.

김기덕은 운도 좋았다. 일제는 나진항 건설을 발표하면서 거의 절반의 토지를 수용했지만 김기덕이 소유한 간의동(間依洞), 신안동(新安洞)에는 되레 시가지가 조성될 예정이었고, 공업지대 예상지에도 막대한 토지가 있었다. 그가 가진 450만 평의 토지를 평당 2원으로 계산하면 900만원이고, 5원씩 계산하면 4500만원으로 민영휘와 김성수 일가를 멀찌감치 따돌리고 조선 제일의 부호로 등극한 것이다. 나진이 앞으로 대련을 능가할 대도시로 성장할 것이라는 것이 일반적 관측이었으니 김기덕의 재산은 계속 올라갈 것이었다.

함북 경성(鏡城) 출신의 홍종화 역시 한미한 농가의 아들로 태어나 망국 전 경성에 있던 함일(咸一)학교와 경일야학(鏡一夜學)에서 공부하다가 학교가 강제로 문을 닫자 사업에 뛰어들었다. 그가 주목한 것은 일본군 군수품(軍需品)이었다. 조선에는 용산(龍山)의 20사단과 함북 나남(羅南)의 19사단이 있었는데 홍종화는 나남의 19사단을 주목했다.

홍종화, 만철 토지 수용 때 갈등 빚기도
만주침략과 만주의 독립군을 염두에 둔 일본이 나남을 사단 본부로 확정했을 때 나남은 불과 수십 호의 농가가 살던 한미한 촌락이었다. 홍종화는 나남 군영지(軍營地) 부근의 토지와 일반 주민이 거주할 만한 토지를 매수하는 한편 군수품을 납품하는 용달상(用達商)으로 나섰다. 물론 일본군 사단 병력이 주둔하는데 일본군 군납업자가 따라붙지 않을 리 없어서 후쿠시마(福島律次)나 요시다(吉田) 같은 거대 자본의 군수업자가 있었지만 수만 명에게 제공되는 모든 군수품을 독점할 수는 없었다.

홍종화는 나남사단에 군수품을 납품하면서 차츰 자리를 잡기 시작했고 수만원을 모으자 북선일일신문(北鮮日日新聞)도 경영했다. 홍종화는 군사적 관점에서 경제를 바라보면서 부동산 사업에 나섰다. 일본이 러시아의 부동항(不凍港)인 블라디보스토크에 필적할 군사도시를 북관에 세울 것으로 예상하고 천연 지리가 동양 제일이라는 나진만(羅津灣)을 주목했다. 홍종화가 전 재산을 기울여 웅기와 나진 지역의 토지를 매입하자 지방 주민들은 물속에 황금을 버리는 격이라고 비웃었다.

그러나 1931년 9월 일본군이 만주사변을 일으키자 홍종화는 살던 집까지 금융조합에 전당잡히면서 나진과 웅기의 토지를 매입했다. 홍종화의 소유 토지 규모는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었지만 대략 500만 평이 넘는다고 예상했다. 평당 2원씩 잡아도 1000만원인데 종단항 발표 후 나진에 평당 30, 40원을 호가하는 토지가 다수 생겨났으니 김기덕과 함께 조선 제일의 부자가 된 것이다. 게다가 만철(滿鐵:만주철도)에서 1933년 4월부터 1년 동안에만 1700만원을 투자해서 나진에 시가지와 부두를 건설할 계획이라고 발표하자 땅값은 더욱 폭등했다.

이때 홍종화는 만철과의 갈등도 겪었다. 홍종화의 토지 3만 평이 수용되었는데, 1934년 만철에서는 8만원을 제시한 반면 홍종화는 80만원을 주장했던 것이다. 그 결정권을 가진 인물은 우가키 가즈시게(宇垣一成) 총독이었다. 그런데 삼천리 1932년 12월호에서 한양학인(漢陽學人)이란 필자는 나진의 미래에 대해 의미심장한 분석을 내놓았다.

“일본이 조선의 여덟 배에 해당하는 넓고 넓은 만몽(滿蒙)천지에 대한 대륙정책을 포기하지 않는 한, 또 이 대륙정책이 발단이 되어 13대(對) 1, 53대 1 적(的)으로 대세가 유도되어 건곤일척(乾坤一擲)의 세계적 대전이 일어나지 않는 한 대전이 일어나도 일본이 패주하지 않는 한 결코 나진항은 경제적, 군사적으로 값이 떨어지지 않으리라.(삼천리 1932년 12월호)”

53대 1 같은 표현은 만주사변 후 일본이 국제적으로 고립된 상황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1933년 2월 24일 국제연맹은 일본군의 만주 철수 권고안을 42 대 1로 채택했고 일본은 연맹을 탈퇴했다. 만주 특수에 도취된 일본인들은 연맹 탈퇴를 오히려 환영했다. 자본주의가 덜 발달했던 일본 경제는 전쟁을 통해서만 성장할 수 있었다. 이른바 식민지 근대화론의 맹점이 여기에 있다. 일본 자본주의는 조직폭력배가 민간인의 돈을 갈취하는 착취경제와 같았다.

그렇게 일제는 확전의 길로 나가서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을 일으켰고 ‘패주’하고 말았다. 그런 침략의 떡고물 일부가 일시나마 관북의 부동산 붐으로 나타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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