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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호, 그대와 19년 우린 행복했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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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박찬호가 지난달 3일 대전구장에서 열린 프로야구 KIA와의 경기에 올 시즌 마지막으로 등판한 뒤 마운드를 내려가면서 관중들에게 모자를 벗어 인사하고 있다. 그는 29일 은퇴를 선언해 이 경기가 19년 프로야구 인생의 마지막 등판이 됐다. [중앙포토]

박찬호(39·한화)가 결국 은퇴를 선언했다. 한국인 최초의 메이저리거, 한국 야구의 아이콘이 19년간의 프로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박찬호는 29일 한화구단에 은퇴 의사를 전달했다. 은퇴 선언 직전까지 “하루에도 몇 번씩 마음이 바뀐다”고 털어놨던 그는 각 구단 보류선수명단 공시일을 하루 앞둔 날, 떠나기로 결정했다.

 그는 항상 최초였고, 최고였다. 세상 맨 꼭대기에 올랐다가 바닥까지 추락했고 다시 일어섰다. 박찬호는 한양대 재학 중이던 1994년 LA 다저스에 입단했다. 한국인 최초의 메이저리그 계약이었다. 힘든 마이너리그 생활을 거친 뒤 96년 빅리그에 입성했고, 이듬해부터 풀타임 선발로 활약했다. 박찬호가 불같은 강속구로 거구의 메이저리그 타자들을 잡아낼 때마다 온 국민이 환호했다. 박찬호의 전성기는 국내 외환위기 시기와 정확히 일치했다. 박찬호는 대한민국을 대표해 절망 위에서 희망을 던졌다. 프로야구 뉴스보다 박찬호 뉴스가 비중이 더 컸다.

 다저스에서 80승을 거둔 박찬호는 2002년 텍사스 레인저스와 5년 총액 6500만 달러(당시 환율로 약 900억원)에 계약했다. 메이저리그 최고 수준이었다. 부와 명예를 거머쥔 박찬호는 곧 아메리칸 드림이었다.

 이후 박찬호는 추락을 거듭했다. 부상과 부진에 시달렸고 4년간 22승만 거두고 텍사스에서 샌디에이고 파드리스로 트레이드됐다. 고액 연봉자가 부진하자 현지 언론은 박찬호를 무섭게 비판했다. 성공의 빛이 강렬했던 만큼 그림자도 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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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찬호는 불펜에서 또는 마이너리그에서 계속 던졌다. 비난을 받고 거의 매년 팀을 옮기면서도 포기하지 않았다. 메이저리그에서 그만큼 돈을 벌었고, 그만큼 성공과 실패를 경험했다면 대부분 그라운드를 떠나지만 박찬호는 계속 도전했다. 박찬호의 성공을 보고 미국에 진출한 김병현(넥센)·서재응·최희섭(이상 KIA) 등 ‘박찬호 키즈’들이 메이저리그에 왔다가 돌아갈 때까지도 그랬다.

 2010년 뉴욕 양키스에서 피츠버그 파이리츠로 트레이드된 그는 2010년 10월 2일 플로리다 말린스전에서 통산 124승을 기록했다. 노모 히데오의 기록을 뛰어넘는 아시아인 메이저리그 최다승이었다. 미국에서 마지막 꿈을 이룬 박찬호는 2011년 일본 오릭스를 거쳐 올해 한국 무대로 왔다. 야구인 모두의 뜻이 모여 한화는 신인 지명 절차 없이 ‘박찬호 특별룰’을 통해 그를 데려왔다.

 박찬호는 한화가 제시한 연봉 6억원을 야구발전기금으로 내놨다. 그가 국내 마운드에 서자 수많은 팬이 몰렸다. 프로야구 700만 관중 돌파의 일등공신이었다. 박찬호는 국가대표로서 1998년 방콕 아시안게임 금메달, 2006년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4강에 기여한 것 이상으로 한화 유니폼을 입고 팬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했다.

 전반기 4승 평균자책점 3.77로 호투했던 그는 후반기 체력이 떨어지며 1승에 그쳤다. 평생 도전을 멈추지 않았던 그도 세월을 이기지는 못했다. 은퇴 선언을 앞두고 그는 한화 동료들에게 이렇게 털어놨다고 한다.

 “한국에서 던질 수 있어서 너무 좋았다. 우리말로 떠들고 놀 수 있어서 마음이 참 편했다. 한국은 20년 전과 다르지 않은데 난 나이를 먹은 것 같다. 이젠, 쉬어야 할 것 같다.”

김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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