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점장 안하는게 낫겠다" 국민은행 직원들 아우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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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은행 A 지점장은 최근 한 달 새 몸무게가 5㎏ 넘게 빠졌다. 허리디스크가 재발해 물리치료도 받는다. 스트레스 때문이다. “연말 평가가 코앞인데 한 예금주가 40억원을 한번에 빼갔어요. 지점 실적이 곤두박질치는데 어찌나 애가 타는지….” 국민은행은 이달 30일 기준으로 전국 지점의 실적을 취합한다. 이게 올해 평가 자료가 된다. A 지점장은 “평가를 앞두고 초조해 전국을 뛰어다니고 있다. 최근엔 허리에 복대를 차고 접대 골프를 쳤다”고 털어놨다.

 우리은행의 B 지점장은 올 들어 잠을 설친 날이 하루 이틀이 아니다. 거액을 빌려간 중소 건설회사가 올 상반기 부도를 내 이자도 못 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한 회사가 대출을 못 갚으면 지점의 수익 지표와 연체율 지표가 다 망가져 삼중 사중의 고통을 겪는다”며 “요즘 연말 평가를 앞두고 마음고생하는 지점장이 많을 것”이라고 말했다.

 은행 지점장들이 혹독한 겨울을 맞고 있다. 영업 환경은 최악이다. 지점 통폐합이니 명예퇴직이니, 구조조정 소문은 솔솔 들려온다. 몇몇 은행은 더 혹독해진 지점장 평가 제도가 올 연말부터 적용돼 분위기가 더 흉흉하다.

 대표적인 곳이 국민은행이다. 2011년 도입한 ‘투 스트라이크 아웃’ 제도가 올 연말부터 적용된다. 지점장의 2년 실적을 종합해 실적이 저조한 지점장 10% 안팎을 ‘후선 배치’하는 것이다. 후선 배치는 지점 없이 지역본부 소속으로 1인 영업을 시키는 사실상의 퇴출이다. 기존엔 3년 실적을 종합해 후선 배치자를 골라냈지만, 올해부터 평가 기간을 2년으로 줄인 것이다.

 현장에선 아우성이 터져나온다. 국민은행 또 다른 지점의 C 지점장은 “거래처를 뚫고 단골을 터서 ‘이제 해볼 만하다’ 싶으면 퇴출의 기로에 서는 셈”이라며 “경쟁을 포기하고 지점 폐쇄 신청을 한 지점이 나올 정도로 스트레스가 심하다”고 말했다.

 은행 측은 어쩔 수 없다는 입장이다. 절구형 인력 구조 때문에 지점장급의 경쟁이 필연적이라는 것이다. 금융위원회에 따르면 국내 은행원의 절반 가까이(45.8%)가 40세 이상이다. 셋 중 한 명(33.5%)은 20년 넘게 근무한 직원이다. 김형태 국민은행 인사 담당 부행장은 “40대 중후반과 50대 초반의 인력이 많아 인사 적체가 심하다”며 “다른 은행과의 경쟁도 반영해 평가 기간을 줄이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지점 통폐합도 지점장들을 긴장시키는 이슈다. 우리은행이 내년에 적자 지점 15개를 통폐합하기로 결정했고, 신한은행 역시 서울 역삼동 코엑스몰의 점포를 합치기로 하는 등 은행권의 지점 효율화 움직임이 분주하다. 신한은행 한 지점장은 “분위기도 흉흉한데 경기 침체로 고객 유치가 너무 어렵다”며 “금리 0.01%포인트를 놓고 경쟁 지점과 예금·대출 고객 뺏기 싸움을 벌이고 있다”고 한숨을 쉬었다.

금융 전문가들은 “은행권의 실적 스트레스가 지속 가능하지 않은 수준으로 치닫고 있다”고 경고한다. 김우진 한국금융연구원 연구위원은 “은행 최고경영자(CEO)조차 단기 실적으로 평가받는 풍토이다 보니 당장 지점장들을 쥐어짜는 단기 평가 시스템만 발달하는 것”이라며 “영업점 직원들 사이에서 ‘지점장 안 하는 게 낫겠다’는 얘기가 들릴 정도”라고 말했다. 성균관대 이해춘(경제학부) 교수는 “높은 임금과 직책을 놓고 경쟁을 시키다 뒤처진 이들을 내보내는 방식은 고령화 사회에 적합하지 않다”며 “절구형 인력 구조를 극복하려면 임금피크제 등 다양한 고용 방식을 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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