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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s Letter] 석괴(石怪) 삼전도비의 음융한 메시지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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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실 석촌호수 변 삼전도비를 찾았다. 흉직스런 괴물이 빌딩 숲에 숨어 또아리 틀고 있는 모습이다. 그 흉물스러움에 몸서리를 치게 된다. 375년 전(1637년), 조선의 왕은 바로 이곳에서 청태종 앞으로 끌려나와 무릎을 꿇고 머리를 땅에 찌었을 것이다. 대륙에서 일고 있는 형세 변화를 읽지 못해 당한 국난이요, 굴욕이었다.

고개 돌려 멀리 남한산성을 본다. 조선의 위정자들은 성(城)에 갖혀서도 서로 싸웠고, 손가락질을 해 댔다. 사대(事大)를 주장하며 망해가나는 명(明)나라를 부둥켜안고 있었다. 삼전도비는 대륙의 판도를 읽지 못하면 어떤 결과를 맞는 지를 온 몸으로 보여주고 있다.

수교 20년, 돌이켜보면 중국의 존재는 우리에게 '행운'이라 할만했다. 많은 단순 임가공 공장이 중국으로 생산거점을 옮겼고, 덕택에 국내에서는 산업고도화를 이룰 수 있었다.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 때도 그랬고, 10년 후 터진 세계 금융위기에서도 우리는 중국에서 위기극복의 돌파구를 찾았다. 지금도 우리나라 수출 중 4분의1이 중국으로 향하고 있다. 중국의 부상으로 인해 야기됐던 동아시아의 분업구조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응한 것이다. '중국에 한 발 앞서야 한다'는 위기의식이 우리 기업의 경쟁력을 높이기도 했다.

스트레스이기도 했다. 중국의 부상은 우리 경제에 행운이기도 했지만 정치ㆍ사회적으로는 심한 압박감으로 다가왔다. 천안함 침몰, 연평도 포격 등을 겪으면서 우리는 중국의 전략적 이해가 한국의 입장과 언제든지 충돌할 수 있음을 확인했다. 중국에 진출했던 기업들은 현지 기업의 기술추격에 밀려 보따를 싸기도 한다. 중국의 중화(中華)DNA는 새로운 형태의 민족주의로 발현되고, 중국 젊은이들 사이에서 혐한(嫌韓ㆍ한국에 대한 혐오)인식도 빠르게 늘어나고 있다. 인터넷에서는 양국 네티즌들 사이에 비방전이 그치지 않는다.

그래서 언제부턴가 우리는 중국이 잘 나가면 왠지 속이 쓰리다. 중국이 올림픽을 개최하고, 우주인을 우주로 보내고, 심지어 경제 위기를 극복해도 배가 아프다. 땅 사들이는 사촌을 바라보는 심정이다. 이유는 많다. 중국인들은 고구려 역사를 훔쳐가려 하고, 올림픽 성화 봉송한답시고 대한민국 수도 서울에서 '깽판'부리고, 서해안에 떼거지처럼 나타나 고기를 잡아간다. 서해안 '해적' 어선에 의한 우리 해경 피살 사건은 국민의 공분을 사기도 했다. 그러니 중국이 잘 되는 꼴은 보기도 싫다. 행운과 스트레스, 중국은 그렇게 지난 20년 상반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그러나 감정만을 앞에서 중국을 바라볼 수는 없는 일이다. 중국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지는 우리의 미래 안위(安危)를 결정지을 만큼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중국은 지난 30여 년 개혁개방을 이뤄왔고, 미국을 견줄 만큼의 경제력을 갖춰가고 있다. 우리가 원하던, 원하지 않던 그들은 그들이 정한 길을 걷고 있다. 많은 문제가 있겠지만 그 성장은 당분간 지속될 것이다.

중국비즈니스는 점점 더 어려워질 것이다. 그마나 경쟁력을 갖고 있는 많은 기업과 상품이 중국의 블랙홀에 휩쓸려 대륙으로 빨려들 수도 있다.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LCD패널 공장이 중국으로 가고, 또 반도체 공장이 그 뒤를 따르지 않는가. 첨단 기술업종마져 우리나라에 공장을 둬서는 경쟁력을 유지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러니 일자리가 줄어들 수밖에 없다.

경제적 부(富)는 정치적 권력을 만든다. 중국의 영향력은 아시아를 넘어 세계로 뻗치고 있다. 게다가 그들은 스스로를 '아시아의 주인'이라고 믿고 있다. 주변국을 무시하고 깔보기 일쑤다. 한국뿐만 아니라 일본 동남아 등 주변국 대부분이 중국의 존재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그렇다고 한반도를 뚝 떼 다른 곳으로 이사 갈 수도 없는 노릇이다. 중국이라는 존재는 우리가 짊어지고 가아야할 숙명인 것이다.

이런 중국과 어떻게 어울려 살아야 할 것인가? 결론은 '큰 중국, 날카로운 한국'이다.

중국은 규모의 나라다. 대부분의 영역에서 세계 최대, 최고 자리를 차지한다. 중국은 그 규모의 힘으로 지금 세계를 지배하려 한다. 이에 대한 우리의 선택은 '예리함'이다. 정치인은 날카로운 논리로 중국을 설득해 중화의식을 깨야 한다. 한중 관계는 화이부동(和而不同)이어야 한다. 협력과 조화를 추구하지만 그렇다고 중국에 동화되지 말아야 한다. 다가올 아시아 시대를 함께 준비하겠지만, '우리는 분명 너희들과는 다르다'는 인식을 심어줘야 한다. "한국은 잘 못 건드리면 골치 아픈 나라"이어야 한다. 결코 삼킬 수 없는 고슴도치처럼 말이다.

기업은 송곳 같은 날카로움으로 중국 시장을 뚫어야 한다. 모든 분야에서 중국을 이기려고 하기 보다는 특정 분야, 특수 기술로 승부를 내야 한다. 우리가 그 날카로움을 잃는다면, 어머 어마한 중국의 규모에 눌려 질식의 지경에 빠질 수도 있다. "한국 기업에게 잘 보여야 부품을 먼저 공급받을 수 있다"라는 생각을 갖게 해야 한다. 중국기업과의 협력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부가가치 영역을 다시 발굴해야 한다. 디자인, 마케팅, 브랜드, 생산공정, 연구개발(R&D) 등을 눈여겨 봐야 한다. '신뢰'도 우리의 상품이 될 수 있다. 우리 기업과 상품이 중국에서 신뢰를 얻어야 중국도 우리를 존중하고, 우리와 친구하자고 손을 내밀 것이다.

삼전도비는 처연하다. 저 징그럽도록 육중한 몸뚱이가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는 분명하다.

"너희는 지금 대륙의 정세를 아느냐? 그 변화를 읽지 못해 국난의 설움을 당해야 했던 375년 전 조선 사대부들의 우를 되풀이하지 말아라. 그들의 심장을 찌를 수 있는 날카로운 비수 하나 쯤은 갖고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

이번 주말, 우리 모두 아이 손을 잡고 잠실 석촌호수로 가자. 삼전도비가 주는 그 메지시에 귀 기울이자.

한우덕
중앙일보 중국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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