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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강주안 논설위원이 간다

식약처 장벽 넘자 심평원 발목… 환자 “죽으란 얘기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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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강주안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규제에 막혀 벼랑 끝 몰린 희귀암 환자들〉

신경내분비종양 환자 살린 ‘루타테라’ 요법에 ‘치료비 삭감’

해외치료 이력 이유… “앉아서 죽을 순 없으니 또 외국 가야”

 강주안 논설위원

강주안 논설위원

희귀병인 신경내분비종양 환자 이모(53)씨는 요즘 앞이 캄캄하다. 2013년 췌장에서 종양이 발견돼 긴급 수술을 한 뒤 생사의 기로를 넘나든 그는 ‘루타테라’ 핵의학 치료를 받은 뒤 삶의 희망을 찾았다. 갖가지 항암제가 듣지 않더니 루타테라 치료 이후 눈에 띄게 상태가 호전됐다.

 그런 그에게 날벼락 같은 일이 닥쳤다. 지난 9월 서울대병원에서 받은 루타테라 치료에 대해 건강보험심사평가원(심평원)이 문제를 제기하며 ‘치료비 삭감’ 조치를 한 것이다. 이 요법이 한국에 도입되기 전 말레이시아에서 항암 치료를 받았기 때문이라는 이유다. 심평원 측은 이 치료가 4번까지 건강보험으로 가능한데 이 기준에 안 맞는다고 주장했다. 기준에 따른 결정이라는 것이다. 심평원에 해외 진료 자료는 없으나 의사 문진으로 판단한다고 했다.

“국내 치료 막으면 해외로 갈 수밖에”

 이씨는 물론 병원 측도 강하게 반발한다. 과거의 해외 치료를 이유로 국내 치료를 못 받게 하는 건 부당할 뿐 아니라 환자를 위기로 모는 행위라고 지적한다. 서울대병원 핵의학과 강건욱 교수는 “심평원의 조치는 치료비 삭감으로 끝나는 문제가 아니라 해외 치료 이력이 있는 환자는 국내에서 치료를 못 받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때문에 루타테라 치료를 준비하던 환자가 치료를 못 받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강 교수는 “이렇게 되면 환자들은 해외에서 치료받는 방법밖에 없다”고 했다.
 2021년 루타테라가 식품의약품안전처 승인을 받기 전까지 신경내분비종양 환자들은 말레이시아 등지를 찾아가 병원 치료를 받아야 했다. 환우회 회원들이 “국내에서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승인해달라”고 적극적으로 요구하면서 국내 치료 길이 열렸다. 많은 환자가 생명을 연장했다. 그런데 심평원이 제동을 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환자 이씨는 “국내서 치료를 못 하니 어쩔 수 없이 해외로 갔던 것인데 그걸 이유로 국내 치료를 못 받는다니 억울하다”고 했다. 그는 이제 치료를 포기하거나 다시 해외로 나가야 하는 상황이 됐다. 이씨는 “연로하신 부모님이 걱정하실까 봐 암에 걸렸다는 말씀도 안 드렸다”며 “부모님 돌아가실 때까지만이라도 버티면 좋겠는데…”라고 했다.

“부모님 돌아가실 때까지만이라도”

 신경내분비종양 환우회 진미향 부회장은 “너무 막막한 상황이어서 환우들이 카페에서 대책을 논의 중”이라고 밝혔다. 네이버에 있는 환우 카페에 들어가 봤다. 희귀병 환자와 가족들이 루타테라를 비롯한 각종 치료법 정보를 활발히 나누고 있다. 카페 매니저가 ‘황원재’ 라고 돼 있다. 황씨는 정부를 상대로 루타테라 도입을 지속해서 촉구해 국내 치료의 길을 연 주인공이다.
 황씨가 쓴 글을 검색해봤다. 거의 매주 올라오던 게시글이 지난 5월 멈췄다. 5월 3일에 쓴 ‘제발 치료 시기를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라는 글을 클릭해봤다. 용기를 잃지 말고 적극적으로 치료받자면서 ‘꼭 우리 다 같이 100세 만기 생존해요!!!’라고 마무리했다. 그러나 지난 6월 6일 카페엔 ‘황원재 대표님의 부고 소식을 알립니다’라는 글이 올라왔다. 황씨는 치료를 받으러 독일을 다녀온 뒤 사망했다. 진 부회장은 “황 회장 가족의 아픔을 생각해 차마 카페 매니저를 바꾸지 못했다”고 말했다.
 지난 8월 29일 오후 4시쯤 경북 구미의 공설승조당 2관에 들어섰다. 빼곡히 들어찬 납골함 사이에 ‘집사 황원재 2023년 6월 6일 소천’이라고 적힌 함이 보인다. 부인·아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 새겨져 있다.
 기자는 2021년과 2022년에 황씨를 두 번 인터뷰했다. 그는 독일 등지에서 희귀병 치료에 사용하는 악티늄(Ac-225)을 도입해달라며 식약처 등에 도움을 호소했다. 건강해 보였던 그가 이렇게 납골당에 모셔진 게 실감이 안 갔다. 그는 컨디션이 안 좋은 상태에서 독일 치료를 강행한 뒤 일어나지 못했다. 환우회 회원 이진해(70)씨는 “해외 치료는 일정을 조정하기 어렵기 때문에 몸이 안 좋아도 갈 수밖에 없다”고 설명한다.

드디어 시작된 악티늄 치료, 그러나…

경북 경주시 한국원자력연구원 양성자과학연구단에 있는 100 MeV 양성자가속기. 이를 활용해 신경내분비종양 치료제인 ‘악티늄’을 생산할 구상이나 원자력 관련 규제가 많아 차질이 우려된다. [한국원자력연구원]

경북 경주시 한국원자력연구원 양성자과학연구단에 있는 100 MeV 양성자가속기. 이를 활용해 신경내분비종양 치료제인 ‘악티늄’을 생산할 구상이나 원자력 관련 규제가 많아 차질이 우려된다. [한국원자력연구원]

 황씨가 도입을 위해 애썼던 악티늄은 그가 사망한 직후에야 국내 치료가 승인됐다. 루타테라 도입 때처럼 그는 헌신적으로 치료제 도입을 끌어냈지만, 정작 자신은 혜택을 보지 못하고 해외를 전전하다 37년의 삶을 마감했다.
 황씨가 숨진 직후 한국원자력의학원이 식약처 연구자 임상시험 승인을 받아 암 환자 치료를 시작했다. 62살 남성 신경내분비종양 환자는 간의 다발성 전이의 크기와 숫자가 감소했고, 71살 남성 전립선암 환자는 뼈의 다발성 전이가 뚜렷하게 호전됐다. 연구를 진행한 임일한 박사는 “환자들을 고려해 식약처가 결단해준 덕분에 국내 치료를 빨리 시작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그러나 독일 같은 의료선진국에서 시행 중인 치료법을 승인하는 데 1년 이상 걸리는 국내 규제 시스템에 근본적 변화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희귀병 대상 ‘악티늄’ 국내 치료 시작됐으나 원료 품귀 비상

국내 원자력 기술로 생산할 수 있지만 겹겹의 규제에 막혀

 악티늄 치료에도 생각지 못한 먹구름이 다가왔다. 악티늄 공급에 빨간 불이 켜졌다. 독일과 러시아 등지에서 수입해야 하는데 세계적으로 수요가 많아지면서 물량 확보에 비상이 걸렸다.
 임 박사는 “우리나라에서 악티늄을 생산한다면 환자들이 마음껏 치료받을 수 있고 다른 나라에 보내 인류 건강에 기여도 가능하다”고 말했다. 원자력 전문가들은 국내 기술로 악티늄 생산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실제로 한국원자력의학원과 한국원자력연구원에서 생산 방안을 검토 중이다.
 문제는 규제다. 한 학계 인사는 “원자력 관련 규제는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며 “한국원자력안전기술원(KINS)과 원자력안전위원회가 옥상옥처럼 규제하면서 기술 개발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관련 업계에선 “방사능과 무관한 수도관 하나를 설치하려고 해도 과거보다 훨씬 복잡한 허가를 받아야 하는 실정”이라고 말한다.

“의료용 동위원소 대량 생산 추진”

 악티늄 생산을 고려 중인 기관을 찾아가 봤다. 지난 22일 오후 3시쯤 방문한 경북 경주의 한국원자력연구원 산하 양성자과학연구단에선 다양한 연구와 실험이 진행 중이었다. 국내 유일한 20㎃ 대용량 양성자가속기를 이용해 암 치료 등 의료용 동위원소를 생산하게 된다.
 악티늄 생산도 여기서 이뤄지게 된다. 방사선 누출 가능성에 대한 우려가 각종 규제로 연결된다. 모든 시설과 장비는 방사선 차단을 전제로 운영한다. 방마다 벽 두께가 보통 건물의 2~3배는 되고 설비마다 벽돌 모양의 납덩어리로 차단했다. 기계 내부를 들여다보는 유리에도 납이 섞여 있고 두께가 10㎝ 이상이다. 시설에 들어갈 때부터 방사능 측정기를 부착해야 했는데 나올 때 수치를 보니 극히 미미한 양에 노출됐을 뿐이다. 이재상 연구단장은 “의료용 동위원소를 대량 생산할 수 있는 작업을 추진 중”이라며 “철저하게 안전 관리를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치료용 물질 허가 패스트트랙 필요”

 지난 6일 오전엔 서울 노원구의 한국원자력의학원을 찾아갔다. 이곳에서도 방사선 노출을 막기 위해 로봇 팔로 작업을 진행하는 등 겹겹의 안전장치와 두꺼운 차폐 시설이 눈에 띄었다. 건물 안쪽 방에 노란 드럼통 4개가 보인다. 이교철 책임연구원은 “악티늄 생산 원료로 사용하기 위해 확보한 라듐”이라고 했다. 희귀암 치료용 물질을 생산하기 위한 준비는 여러 기관에서 진행되고 있음을 확인했다. 겹겹의 규제가 관건이다.
 김상욱 동국대 신소재화학과 교수는 “환자 치료용 물질과 관련한 허가는 패스트트랙 방식을 도입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원안위 관계자는 “악티늄 국내 생산과 관련해 원자력의학원과 논의를 진행한 적이 있다”면서 “환자 치료와 관련한 사안은 허가 신청이 접수되면 최대한 신속하게 처리하겠다”고 말했다. 정부 관계자는 “국무조정실에서도 악티늄 관련 규제를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대로 두면 죽는데 왜 치료 막는가”

서울대병원 핵의학과 강건욱 교수. 사진 서울대병원

서울대병원 핵의학과 강건욱 교수. 사진 서울대병원

심평원이 루타테라 치료비를 삭감한 조치에 대해 서울대 핵의학과 강건욱(사진) 교수는 29일 “결국 환자에게 해외 나가서 치료하라는 얘기”라고 말했다.

-신경내분비종양 환자들이 “앉아서 죽으라는 거냐”고 반발하는 이유는.

“신경내분비종양은 치료하지 않으면 계속 자라서 죽음에 이르게 된다. 국내서 치료를 안 해주면 빚을 내서라도 외국 병원에 간다.”

-환자가 비용을 부담해 치료를 받을 순 없나.

“안 된다. 건강보험 적용이 안 될 뿐 아니라 치료비를 환자가 부담한다고 해도 제한한다. 자신의 돈으로 치료하겠다는 걸 막는 건 우리나라밖에 없을 거다.”

-심평원에서도 해외 치료 내역을 직접 확인할 방법은 없다고 말한다.

“의사가 차트에 해외 진료까지 상세히 기록했다는 이유로 환자 치료를 제한하는 건데, 상식에 안 맞는다. 해외 치료제 성분이 같은 것도 아니다.”

-어떤 개선이 필요한가.

“암 환자는 개개인에 따라 맞춤형 치료를 허용하는 게 바람직하다. 지금처럼 일률적으로 통제하면 환자 상태를 고려해 최적의 치료를 하기가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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