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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 80년 서울의 여름|언론숙정·통폐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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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제5공화국의 언론장악 기도는 언론기본법 제정으로 그 최종적 모습을 드러냈다.
숙정·통폐합 등을 통해 멋대로 재단한 언론을 소위 언기법이라는 고삐로 끌고 가기 위한 것이었다.
신군부는 당시 인사와 언론만 장악하면 통치기반은 확립된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공직자숙청으로 공무원을 손아귀에 넣고 이어 언론을 강제로 자기편에 끌어넣는 일에 사력을 다하다시피했다. 그런 면에서 당시 언기법 제정을 그들은 대단한 아이디어로 자랑했다.
결과적으로는 인사장악·언론통제 모두에서 실패하고 자신들의 묘혈을 파고 말았지만….
아뭏든 국가보위 입법회의가 만든 악법의 대명사로 지목되어 제6공화국 출범과 더불어 폐기된 언기법은 언론통폐합에 이은 대언론공세의 마무리 조치로 11월중반부터 본격화 됐었다.
문공부등의 관계자들은 언기법 구상은 청와대에서 나온 것이며 그에 따라 문공부 공보국에서 실무작업만을 했노라고 밝히고 있다.
또 공보국의 「언론 창달·육성을 의한 대책안」을 토대로 당시 대통령비서실의 허문도·이수정(현 청와대대변인) 정무제1비서관, 문공부의 김동호기획관리실장(현 영화진흥공사사장), 허만일공보국장(현 기획관리실장), 박용상서울민사지법판사(현 합의10부부장판사)등 5인 실무위원회가 「언론창달에 관한 법안」을 성안했었다고 말한다.
5인위의 이 실무안은 당시 국회를 대시한 국가보위 입법희의에 넘겨져 입법회의 문공의의 4인소위(송지영·정태수·남재희·정범석)의 검토를 거친뒤 언론기본법으로 명칭을 바꾸어 12월26일 본회의를 통과했고 81년1월1일부터 시행케 됐었다.
그러나 전문 57조, 부칙 4조의 기본골격은 실무안이 거의 그대로 채택된 것이며 지나치게 언론을 위축시킨다는 여론이 일자 11개 조문의 일부를 완화한 정도였다.
그나마 수정된 것은 정기간행물등록취소요건과 정정보도시한을 일부 완화하고 언론인의 형사책임관련조항을 「가벌적」에서 「범죄를 구성하는」으로 엄격히 하는 등이었으나 언론에 족쇄를 채우게 될 기본방향은 여전했다.
언론에 정보청구권을 부여하는 등 진일보된 법률이라느니 했지만 우리의 정치·사회 현실속에서 그것이 작용할 방향은 뻔한 노릇이었다.
김동호씨의 증언.
『11월말 청와대가 언기법 제정을 추진중이라는 공보국의 보고를 받았습니다. 언기법 제정방침에 따라 주무부서인 문공부 공보국이 실무작업을 한 것이죠. 청와대 허·이비서관, 박판사 등이 수차례 모여 작업을 했습니다만 ○○위원회라고 따로 이름 붙인 것은 아닙니다.
공보국이 기존의 신문·통신 등의 등록에 관한 법률과 방송법 및 사문화된 언론윤리위원회법을 모체로 기초안을 만들었습니다만 윤리위원회법을 제외한 두개의 벽은 일반절차를 규정한 절차법에 불과하니까 기본방향 등은 서독법이 많이 감안됐을 겁니다. 언론관계법 전문가인 박판사가 전체적인 골격을 잡았고 박판사는 「독일에 있어서 언론자유와 공적책임」이란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땄으니까요. 한마디로 언기법 제정의 배경은 언론계 구조개편이란 큰 테두리에서 추진된 것으로 봐야합니다.』
『언론에 관한 전반적인 법률 제정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는 소신을 밝히고 있는 박판사의 증언.
『11월하순 문공부로부터 연락을 받았습니다. 내가 실무팀에 왜 포함됐는지는 모르나 현직법관 중에 언론법을 연구한 사람이 없기 때문으로 추측합니다. 석사·박사논문 모두가 언론관계이고 「서울의 봄」당시에 언론관계 세마나에 참석해 주제발표를 했으니까 누가 추천한 것 같아요.
플라자호텔에서 허씨 등 5명이 처음으로 만났고 2∼3일에 한번씩 서울시내 호텔방을 옮겨가며 만났습니다. 10차례 미만 정도의 회합을 가졌는데 허문도씨는 첫모임이후 한두차례 얼굴을 내밀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당시의 위치 등으로 허씨가 리더로서 일을 추진했습니다. 문공부가 작성한 실무대책위 명단에는 다른 교수·검사·보안사·정보부요원 등이 들어있지만 이들은 직접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12월중순쯤 작업이 끝났는데 문공부 김실장·허국장은 상당히 강경한 편이었고 이수정씨가 비교적 내 의견에 동조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작업은 문공부의 시안을 법조문으로 바꾸는 형식으로 진행했는데 그것은 법률로서 포괄성이 부족했고 조문도 너무나 엉성했어요. 다만 언론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려는 의도는 뚜렷했습니다. 결국 조문화과정에서 상당한 내용이 첨삭됐고 특히 첨가부분이 많아 분량도 상당히 늘어났지요.
삭제한 주요부분은 「윤리위원회」조항이었어요. 64년 언론문리법 제정당시 언론계의 심한 반발로 극심한 언론파동을 겪었던 점등을 들어 삭제시킬 수 있었는데 초안의 언론윤리위조항은 언론사 사장이 위원이 되는 위원회를 구석, 정기적인 사후검열을 하도록 했으며 위원회가 윤리규정을 제정해 3회이상 규제에 걸리면 문공부장관이 등록을 취소하게 한 것입니다.
또 기자는 반드시 공채로 선발하고 일정기간 교육을 받아야하며 일정시일이 지나면 재교육을 받도록 하는 의무조항도 있었고, 금고이상의 형을 받은 사람은 기자가 될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었는데 자격과 연수교육부분을 완화시켰습니다.
반면 삽입을 제외한 것은 정보청구권·압수의 제한·정정보도 청구권·책임편집인제도·취재원에 대한 진술거부권 등입니다.
물론 정정보도청구권 놓고 언론을 제약하는 요소로 볼 수 있으나 서독에서는 책임편집인 제도와 함께 이미 확립된 것으로서 언론의 자유보장과 함께 책임을 분명히 하는게 바람직하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러나 등록취소조항 삭제주장은 먹히지가 않았어요. 제일 아쉬운 점이며 「만약 앞으로 이 법의 존폐문제가 거론된다면 이 조항 때문」이라고 까지 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등록취소조항은 종전에도 법에 명시돼있었지만 이때는 주로 발행시설기준미달 등 주로 형식상의요건미비일 경우였으며 언기법에 제시된 「폭력행위 등 사회질서를 혼란시키고 고무·찬양하는 내용」등의 조항은 없었습니다. 그래 이것들은 행정적인 규제의 대상은 될지몰라도 사법적 제재는 언론자유에 어긋나는 것이라고도 말했고 신문통신 등에 관한 법률3조4항을 원용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도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물리적인 힘을 배경으로 이렇게 제도적 통제장치를 완비한 5공화국은 「협조」라는 미명의 홍보조정을 통해 모든 언론을 농단하려는 시도를 계속했고 결과적으로는 스스로의 눈귀를 멀게함으로써 자멸의 늪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특별취재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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